<의식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잊힐 기억들>
사이
나는 중첩되어 있다. 특별한 나, 그리고 평범한 나.
자신에게 있어 나는 특별하지만, 타인들 속에 있어 나는 평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삶은 언제나 ‘사이’에서 머문다.
하지만 평범하고도 특별한 그 어떤 내가, 모든 내가 맞다는 것만은 마치 삶에서 얻는 전리품 같은 진실이므로, 오늘도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 외로움과 쓸쓸함 사이, 하현과 그믐사이, 낮과 오후 사이에서 의자에 눕지도 앉지도 않은 채 글을 쓰거나 적는다.
출처
부모의 황혼이 슬픈 이유는, 삶이라는 논문에 기재된 출처의 상실 때문일까.
매 순간 자신의 출처였던 부모가 어느 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한 순간이 찾아올 때, 그때는 일종의 실향민이 된 듯이 살아가겠지만…
나중에 가서 부모가 떠난 후엔, 어느 날은 부모의 얼굴보다 부모의 살냄새가 더 그리워질 그 순간에 가서야 고향도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출처는 그렇게 호적이 아닌 기억으로부터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예감.
비록 그때가 내 눈에 노랑이 녹아내릴 때쯤이라 할지라도…
주술적 언어
언어는 그 자체의 주술적 성질에 의해서 부르면 부를수록 길이 들고, 말하면 말할수록 사고는 그리 흘러간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라는 언어에 닮아가며, 한 편의 에세이 같은 삶을 살아내고 나면 비석에 적힌 비문이 나를 대신할 것이라는 예감을 믿는다.
주말의 일상
창문볕이 좋은 주말에는 한낱 방구석 추물이 되어 고양이 털로 이미 야생이 되어버린 방바닥을 고양이처럼 뒹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치 내장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밖에서 썩고 말 테다.”라는 심정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마트를 찾아가거나, 로또라는 희망적 핑계를 만들어 천금을 노려보는 시늉으로써 외출을 하기도 한다.
참, 밖에 나갈 때는 살그머니, 조용하게…
부디 고양이는 깨지 않도록..
한
우연히 영화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토록 맘 속에 그리던 동생을 다시 만났음에도 결코 서로를 모르는 척 단 하룻밤의 곡조만으로 밤을 다 새버린 후 떠나는 동생을 보던 그녀에게 동거하던 남성은 이대로 동생을 떠나보내도 괜찮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요.”
이 말은 정녕 무슨 뜻이었을까?
아마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외로움과 쓸쓸함 만으로도 삶을 저버리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한계점을 지나고부터는 반대로 그 외로움을 유지하고 간직함으로써 삶이 살아지는 것일 수도…
때문에 동생이 떠난 후, 곧이어 그녀 역시 자신에게 친절했던 동거인을 기어코 떠나야만 했던 것일 게다.
‘한’은 고통으로부터 맺히지만, 고통은 ‘한’으로부터 완화된다.
스노글로브
스노글로브 속에서 내리는 눈은, 화폭 속에서 그려지는 일상처럼 화가 스스로 잡아두고 싶은 순간만을 포착하여 영원으로 남기는 붓질 같은 것이다.
하지만 눈(雪)은 수정구 속에서 영원하여도, 내 눈(目)은 영원하질 못해서 영원을 영원히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스노글로브와는 달리, 나는 끝내 시간에 가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