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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Aug 04. 2022

한결 너그러워진 혓바닥으로




살다 보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사람 입맛이다. 일관성 있게 유지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잠시 바람이 머물다 가듯이 금세 바뀌는 부분도 있다. 예전의 나는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한 맛을 한결같이 계속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 소나무 같은 입맛 자체를 나의 불변하는 정체성처럼 여기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임의로 정해 놓은 입맛에 나를 맞춰 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맛없어하는 것’으로 한번 정의 내리면, 다시 먹었을 때 썩 맛있어도 ‘아냐, 원래 난 이걸 안 좋아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런 나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칼국수와 수제비라면 무조건 질색하고 기피하던 나는 이제 가끔 칼국수와 수제비를 먹는다. 내가 싫어하는 건 밀가루 덩어리를 씹는 듯한 두꺼운 면과 반죽이지 칼국수와 수제비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다. 얇고 쫄깃한 식감이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대개 감자 전분이 들어간 반죽이어야 그게 가능한 것 같다. 수타 장인이 얇고 탄력 있게 뽑아낸 경우라면 더 좋을 것이다. 아직은 그런 가게를 가본 일이 없다. 지금은 코로나 확산세가 다시 거세지는 추세이니 나중에 장인의 칼국수와 수제비 집을 찾아가 먹어 보고 싶다.


출처: pixabay, 저작권 없는 이미지

 

들깨 칼국수와 수제비를 정말 싫어하는데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나에겐 냄새가 너무 역해서 먹는 건 고사하고 냄새 맡는 것조차 괴롭다. 만약 내가 들깨 국물 요리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것까진 아니고…… 완전히 뒤집히기 직전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들깨는 나와 거리가 먼 음식인 듯하다. 이런 음식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겠지?    



잘 안 먹던 음식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족발은 한 점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비빔 막국수를 돌돌 말아서 먹으면 제법 먹을 만하다. 갓 나온 족발은 생각보다 촉촉하고 쫄깃쫄깃했다. 돼지 냄새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먹어온 족발은 공교롭게도 다 식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족발은 퍽퍽하고 냄새가 나는 음식이라고만 여겼던 거다. 그렇다고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비빔 막국수가 없으면 따로 먹지 않는다.


냉면은 근래에 비빔냉면의 참맛을 조금 알게 됐다. 비빔국수는 원래 좋아했지만, 비빔냉면 양념은 너무 맵고 혀가 따가운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깃집에서 나만 빼고 다들 비빔냉면을 시키기에 몇 입 먹어 봤더니 비빔냉면도 맛이 괜찮았다. 그 매콤달콤한 양념이 고기와 잘 어우러지기도 하고, 입 안 점막을 자극해 식욕을 다시금 돋우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물냉면과 비빔 냉면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여전히 물냉면이다. 더 시원하고 국물이 많아 여름에 먹기 제격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동치미와 소고기 양지머리 육수를 섞은 물냉면 국물이 맛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한식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콤달콤한 국물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오이냉국의 국물도 좋아한다.


여담으로, 냉면 위의 삶은 달걀은 면발의 메밀 성분이 위벽을 상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무가 메밀의 찬 성분을 중화시키고, 달걀은 위를 보호한다. 빈속에 메밀은 속을 불편하게 하여 원활한 소화 활동을 방해하지만, 그 전에 달걀을 섭취하면 방지할 수 있단다. 그동안 물냉면을 먹을 때 국물이 흐려진다며 마지막까지 달걀을 남겨두었던 나를 반성한다. 이제부터는 국물에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선달걀 후냉면’을 실천하려 한다. 강철 위장을 가진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겠다만 그다지 강철이 아니라면 위벽 보호를 위해서 달걀을 먼저 먹는 게 좋겠다. 탈이 잘 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 얘기다.



간식 취향에도 변화가 있다. 난 이제 블루베리와 빵 속 건포도, 녹차 초콜릿을 받아들이는 혀를 갖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블루베리 요거트와 모카크림식빵 속 건포도, 킷○ 녹차맛을 먹을 수 있게 된 거지만 이들을 일절 거부했던 내 철옹성 같은 혓바닥에 있어서는 놀라운 변화다. 특히 건포도와는 평생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른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난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바로 하루치 견과류 봉지를 뜯으면 건크랜베리만 골라 먹던 습관이 건포도에 대해 재고해 보게끔 한 것 같다는 설이다. 건포도는 싫은데 건크랜베리는 왜 맛있나 했더니 물컹하지 않고 쫀득해서였다. 더 생각해 보니 건포도만 따로 먹어 본 적은 없었고, 늘 롤케이크나 다른 빵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먹어왔다. 건포도가 싫었던 건 크림 등 수분에 절여져 축축하고 물컹한 식감 때문이지 건포도 자체는 아니었다.


출처: pixabay, 저작권 없는 이미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난 건포도에 한층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빵 속 건포도 중에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건 아직 모카크림식빵 속 그것뿐이다. 모카크림식빵은 향긋하고 담백한 커피 빵에 달콤쌉싸름한 크림이 맛있지만 먹다 보면 속이 느끼해지는데, 그 속의 건포도는 산뜻함을 더해주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건 물컹함마저 견딜 수 있게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따금 빵집에 갈 때 건포도가 든 모카크림식빵 쪽으로 눈길이 가는 걸 보면 정말 건포도에 스며드는 중인 것 같다. 그래도 롤케이크 속 건포도는…… 아직 거리 두기 하는 중이다.


굳건한 입맛을 발견할 때면 오랜 습관이 한 번에 바뀔 리는 없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면이 있음에 즐겁다. 꺼리던 음식을 기꺼이 수용하게 되는 일은 내게 드문 일이라 그 의미가 크다. 비록 작고 사소한 부분이지만 의외의 모습을 찾는다는 건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 다양한 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포용력은, 음식의 스펙트럼을 차차 넓혀가는 방식으로 시작된다고 봐도 좋다. 삶과 분리하여 이야기할 수 없는 식문화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다른 분야로도 퍼져나가고 결국 그 삶 전반의 색깔을 바꿀 수도 있다. 폐쇄된 태도에서 개방된 태도로, 편애에서 박애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음식에서부터 뗄 수 있다고 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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