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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Sep 03. 2023

흔적

과거는 현재가 되며, 현재는 미래의 흔적이다.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여름 태양이 또 하루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간다. 노을을 따라 초승달은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밤은 깊을수록 별들은 더욱 영롱하게 반짝인다. 어둠은 세상의 주인이 된다. 어둠에 압도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빛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잘 안다. 어둠이 있기에 낮은 경외의 시간이 된다. 어둠이 있기에 태양은 신이 된다. 어둠이 있었기에 별은 인류의 희망이자 소원이 된다.


우주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우주에서 빛은 별의 특별한 흔적이다. 지구 가까이 태양이 있어 우리는 어둠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지구를 밝혀줄 수 있는 것은 태양뿐이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별은 천구의 남쪽 별자리인 센타우르스자리의 프록시마다. 사실 가깝다는 말이 무색하게 서로는 4.24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태양과 프록시마의 별빛은 그 먼 거리를 쉼 없이 날아와 찰나의 시간을 스쳐 지나는 인연이 된다. 그렇게 두 별은 서로의 흔적으로만 만날 수 있다.


2023년 8월 21일 월요일

아침부터 송해공원이 분주했다. 태풍과 폭우가 호수에 많은 쓰레기를 끌고 내려왔다. 옥연지 중앙에는 쓰레기 섬까지 생겼다. 붉은 구명 동의를 입은 작업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일부 작업자는 작은 보트에 올라 물 위에 떠 있는 쓰레기를 긁어모았다. 작은 굴착기는 옥연지 호수 주변에 쌓인 쓰레기를 들어 올려 트럭에 싣고 있었다. 쓰레기와 작업자로 인해 호수 주변의 새들은 모습을 감췄다. 꾀꼬리는 호수의 분주함을 모르는 듯 숲 속에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한가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옥연지 위에 설치된 화단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여름은 송해공원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지난여름 내린 비의 흔적은 여전히 옥연지에 쓰레기로 남았다.

2023년 8월 22일 화요일

화원 IC를 지나 옥연지에 들어서면서 오늘도 작업자들이 보트를 타고 쓰레기를 옥연지 주변을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를 주차하고 산책을 시작했다. 옥연지로 유입되는 수량이 급격히 줄어 있었다. 어제의 분주함으로 사계공원 주변 쓰레기는 많이 사라졌다. 나무 데크를 따라 담소 전망대로 걸어 들어갔다. 지난여름 폭풍우로 쓰러졌던 나무가 통나무 조각으로 잘려 한편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온몸의 반을 잃은 나무줄기에는 큰 생채기가 흔적으로 남아 그날의 강렬했던 폭풍우를 증언하고 있었다. 

꾀꼬리의 노랫소리를 따라 등산로를 올랐다. 초입부터 제비나비 무리가 꽃에 얼굴을 처박고 열심히 꿀을 빨고 있었다. 제비나비는 꽃들 사이를 우아하게 날아다녔다. 순간 나의 관심을 잃은 꾀꼬리가 시기한 듯 연신 울어댔다. 산책하는 동안 꾀꼬리 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한 녀석도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꾀꼬리에 대한 아쉬움은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내내 남았다. 차를 향해 다리를 막 건너는 순간! 물길을 따라 물총새 한 마리가 빠르게 날아갔다. 반가웠다. "녀석 여름을 잘 지냈구나!" 하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바위에 앉은 다른 물총새 한 마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급히 사진기를 들어 초점을 맞추려는데, 작은 피사체를 찾는 카메라 반응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리고 나는 찻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지나는 차를 피해주려 두어 발 앞으로 움직였다. 물총새는 그 순간을 알아채고 쌩하니 날아가 버렸다. 

꽃이 지기 전에 나비는 가능한 많은 꿀을 먹어 두어야 한다.

2023년 8월 23일 수요일

사진기를 들고 어제 물총새가 앉아 있던 바위를 응시했다. 선명한 파란색의 물총새가 내가 찾아내기 전에 휙 날아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물총새의 이동 경로를 따라 천천히 눈길을 옮겨 보았다. 찾았다! 호수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녀석이 앉아 있었다. 그 녀석은 열심히 사냥하고 있었다. 빠르게 수면으로 곤두박질치고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왔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부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냥은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 아마도 사냥 경험이 부족한 어린 개체인 듯했다. 이때 녀석 주변으로 다른 녀석이 날아들었다. 두 녀석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 나뭇가지에 두 마리가 함께 앉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2023년 8월 24일 목요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냇가 옆 바위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떼는데, 두 녀석이 날아가 버렸다. 녀석들이 바위 주변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중 한 마리는 얼마 날지 않고 작은 돌 위에 등을 보이며 내려앉았다. 다행히 사진에 담을 시간을 허락해 주고는 잠시 뒤 다른 한 마리가 달아난 숲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면 위로 올라온 나뭇가지를 관찰했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백로와 왜가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옥연지 주변은 청소를 한 덕분에 많이 깨끗해졌다. 큰 잉어도 다시 호수변에서 헤엄치며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잠시 물총새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도 열심히 사냥 중인 녀석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젯밤 비로 불어난 물로 인해 사냥은 더욱 쉽지 않아 보였다. 

물총새는 나의 침범이 심퉁이 났는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2023년 8월 25일 금요일

오늘은 동반자가 있었다. 저녁 행사로 동료 한 분이 나와 카풀로 아침 산책에 동행했다. 길을 나서려는데 삼각대에 설치된 큰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대포 카메라였다. 카메라 렌즈는 물총새가 주로 나타나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다리 위에 장화를 신은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손에 작은 리모컨이 들고 있었다. 작가는 물총새의 사냥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녀석들이 앉을 나뭇가지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작가에게 물총새의 동선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산책은 담소 전망대까지 이어졌다. 산책을 하며 꾀꼬리 소리를 알려 주었다. 호수면으로 고개를 내민 거북이도 소개해 주었다. 이런저런 소개를 하며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 나뭇가지 위에 심상치 않은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 사진부터 찍었다. 여러 번 주변을 나는 것을 보았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녀석이었다. 교무실 책상으로 돌아와 그 녀석의 정체를 조사했다. 파랑새였다. 이제 새로운 미래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파랑새 한 마리가 나를 새로운 미래를 이끌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과거 위에 세워진다. 현재는 미래의 과거가 된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흔적은 삶에 매우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 심지어 작은 생각 하나도 한 개인의 인생 흔적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먼 과거 초기 인류 조상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유인원 조상은 굽이치는 생명의 강줄기를 헤치며 현재 나에게로 이어졌다. 조상이 자연의 힘든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나의 모든 것은 현재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이란 살아남기 위해 역동적인 몸부림이다. 현재 모습으로 생명이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별로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많은 흔적이 켜켜이 쌓여 현재 모습으로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  


생명체는 과거 생명의 흔적을 토대로 살아간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의 본질은 역동성이다. 송해공원에는 생명은 여전히 역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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