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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Sep 18. 2023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가을이 다가온다.

자연에는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성이 있다. 정지한 물체는 정지한 상태로, 움직이는 물체는 움직이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 관성이다. 세상 많은 것은 관성을 따른다. 자연이 자연스러운 것은 시나브로 변하기 때문이다. 급격한 변화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생존의 위협이다.


고양이가 풀밭 위를 걷듯 가을이 사뿐사뿐 조심스럽게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아침 공기는 이미 기분 좋게 선선하다. 짙은 푸른색으로 변한 하늘에 양 떼 같은 구름이 높이 흩어져 있다. 나무에 걸린 이파리는 조금씩 마르고 있다. 성급한 녀석들은 낙엽이 되어 이미 길에 내려와 땅바닥을 덮고 있다. 뾰족한 가시 옷을 입은 밤송이는 제법 덩치를 키웠고, 갈색을 띠기 시작한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성급한 어른들은 이미 곳곳에 어진 도토리를 줍고 있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얼굴을 수줍게 내밀고 있다.

시나브로 가을이 다가왔다.

2023년 9월 4일 월요일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산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였다. 송해 공원에는 가을 느낌이 물씬 풍겼다. 화창한 하늘은 높아졌다. 시냇물도 맑고 잔잔하게 흘렀다. 공기까지 상쾌한 가을 아침이었다. 오늘따라 새들도 유난을 떨었다. 수풀 사이 텃새들은 재잘대며 바쁘게 좁은 공간을 날아다녔다. 꾀꼬리는 짝을 지어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분주히 날아다녔다.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는 합창이 되어 공원에 울렸다. 오늘따라 산비둘기의 소리조차 오케스트라의 한 파트인 듯 구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호숫가에는 베스 퇴치 행사에 참여하는 낚시꾼이 모여 있었다. 매달 첫 번째 월요일이다.


2023년 9월 5일 화요일

푸른 하늘에 구름이 높게 걸려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와 달리 아침에는 서늘한 바람이 한들한들 불었다. 시냇물도 졸졸졸 가을을 향해 조용히 달리고 있었다. 오늘도 꾀꼬리가 파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물총새를 찍으러 온 사진작가는 오늘 허탕을 친 듯 모래사장 위 텐트를 빨리 철거해 가버렸다. 물총새가 사냥 시간과 장소를 잠시 옮겼기 때문이다.

하얀 반달이 가을 하늘을 기다리듯 높이 떠 올랐다.

2023년 9월 6일 수요일

높은 가을 하늘 하얀 반달은 가려줄 구름 한 조각 없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새들의 움직임도 잦아있었다. 녀석들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한동안 보이지 않던 곤줄박이 무리가 전깃줄에 반갑게 내려앉았다.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나비 떼가 내 앞으로 확 날아올랐다. 복숭아나무 밑에는 열매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발효된 열매에서는 달고 시큼한 식초 냄새가 풍겨 올랐다.

산책 데크를 걸으면서 큼지막한 연두색 애벌레를 만났다. 애벌레는 자기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아야만 우화 한다. 모든 여름의 기억을 벗어던지고 우화 한 나비는 새로운 가을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다. 사람의 발걸음을 피해 무사히 변화의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나무 데크 길 옆, 숲으로 살짝 던져 주었다. 부디 삶의 마지막 여정을 완성할 수 있기를!

산책로 입구에는 깜순이가 계속해서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까만 눈동자에는 기운이 없다. 갑자기 깜순이가 몸을 일으켰다. 임신으로 처진 배가 눈에 들어왔다. 깜순이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산책을 나섰다. 발걸음이 조금 힘들어 보였다.

나와 마주쳐도 깜순이는 더 이상 짖지 앉았다.

2023년 9월 7일 목요일

송해공원의 산책길 기온이 20도 밑으로 떨어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약간의 한기도 느껴졌다. 긴팔 잠바가 이젠 필요할 때이다. 오늘도 여전히 꾀꼬리는 쌍으로 숲과 숲 사이를 날아다녔다. 산속에서 서로의 밀애를 나누는 듯 아름다운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늘은 높고 맑았다. 하얀 반달이 떠 있었다. 생태 연못에는 수련이 피었고, 아마존 연은 큰 연잎을 수면 위로 피워 띄우고 있었다. 흰뺨검둥오리들은 연잎이 침대인양 연잎 위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고 있었다.


2023년 9월 8일 금요일

아침부터 교통 체증이 엄청났다. 오는 길 두 곳에서 사고가 있었다. 아침부터 생기는 사고는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다. 평소보다 20분이나 더 걸려 공원에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가볍게 산책을 했다. 송해공원의 화단에는 새롭게 심을 화분을 한참 내려놓고 있었다. 이제 공원에도 새로운 식구들이 곧 자리할 것이다.

가을맞이 꽃들이 공원에 도착했다.

가을이 온다는 입추는 8월 7일.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는 8월 23일이었다. 절기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계절은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가을로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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