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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각 Nov 03. 2023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

10. 이민자로서의 삶

    '정착', 어딘 가에 오랜 기간 머물며 그곳에서 내 삶을 꾸려간다는 것은 잠깐 들러 여행하는 것과는 무척 다릅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렇겠지만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대에는 대게 적잖은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 타국에 와서는 '설렘' - 그렇게 첫 몇 년간은 다양한 걸 알아가는 '재미' - 그 와중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외로움' - 그러다 더 이상 이국적인 건물들에 대한 감흥이 뜸 해지게 되면 그제야 정말로 이곳에서 '살고 있는' 단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다년간 영국에 살며 '짧은 여행', '긴 여행', '학생'으로서 이 이국의 땅을 마주했고 석사 졸업과 함께 드디어 '이민자로서의 삶'이라는 최종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내가 나고 자란 사회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간혹 사람들이 '아 나도 외국이나 나가서 살까'하고 가볍게 말하곤 하지만 실상 진지하게 외국에서 나가 살 계획을 세워보자면 법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방인으로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아주 매혹적인 개념인 건, 아마 그 개념 자체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유, 그 말인 즉, 내가 살고자 하는 곳을 말 그대로 세계 지도를 펼쳐두고 찍어 고를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옷 쇼핑을 하듯 수많은 나라, 도시들을 쓱 둘러보며 내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를 골라 사는 것입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가치들에 무게를 얼마나 두는지,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선택에, 가장 제게 알맞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어떤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가. 어떤 기준을 어떤 순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저는 날씨가 좋고 아름답고 또 제 마음이 가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럴 때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그래서 호주 워킹홀러데이 당시 영국 유학을 포기하고 진지하게 호주에 머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고, 또 영국 유학을 막 시작한 당시에는 졸업 후 호주에 돌아가 살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호주라는 나라와 사랑에 빠졌었고 사실 지금도 다른 나라 생각 할 것 없이, 이런저런 고민할 거 없이, 호주로, 퍼스로 돌아가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날씨, 아름다움, 끌림을 넘어 다른 중요한 기준들이 있고 또 혼자 정착하는 것이 아닌 둘이 정착하는 것이기에 안나의 의견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의 또 다른 기준들과 안나의 기준을 모두 합친 '우리'의 최종 기준은 무엇인가. 안나랑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며 다음과 같은 기준들을 세웠습니다.


1. 시골이 아닌 도시 (안나)

2. 가족 및 친구들과 가까이 닿을 수 있는 곳 (안나)  ->  도시 및 나라 간 이동이 편리한 유럽 내의 도시

3. 날씨가 좋은 곳 (은표)  ->  위도 상 런던보다 낮은 곳

4. 영어, 불어, 독일어 사용 국가 (둘 다)  ->  최소 안나는 언어를 새로 배울 필요 없는 곳

5. 관심 있는 분야에 일자리가 있는 곳 (둘 다)  ->  안나는 클래식 음악 쪽, 나는 향 및 관련 화학 쪽의 일자리가 있는 곳

6. 다양한 문화에 대해 열려있고 국제 커플과 그들의 자식으로서 소외받지 않을 곳 (은표)  ->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

7. 안전한 곳 (은표)  ->  교육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배운 사람들이 사는 곳


    이 모든 조건들을 고려해 조사해 보니 꼭 한 곳이 나왔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 그리하여 실제 제네바를 만나보고자 우리는 2박 3일간 제네바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기차역에 도착해 도시 중앙으로 걸어가 레만 호수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아 여기가 내가 살게 될 곳이구나'였습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것을. 제네바는 조사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췄고 체감 물가 역시 걱정했던 것만큼 막 미친 듯이 비싸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영국보다 저렴한 대중교통, 깨끗하고 정돈된 거리와 건물, 밤에 돌아다녀도 안전한 분위기, 그리고 수 없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 밝고 행복한 도시가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어차피 마땅히 다른 선택지도 없었고 워낙 제네바가 마음에 쏙 들었던 지라 바로 제네바로 넘어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1 - 2년간 불어를 공부해 B1 자격증을 따고 Givaudan 혹은 Firmenich로 이직. 그리고 국경 넘어 프랑스에 살며 제네바로 출근. 목표 이사 시기는 2024년 중순. 지금껏 그래왔듯이 이제 다시금 목표를 향해 계획에 맞춰 열심히 달려 해내기만 하면 될 일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꿈을 이룰 것인가

어떻게 유학을 갈 것인가

어떻게 유학 비용을 마련할 것인가

영국 유학,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내 행복에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


일련의 고민들과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거쳐 도달한 지금의 삶. 아직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답을 찾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며 죽는 그날까지 제가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즐기다 가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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