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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Feb 16. 2023

16. 준비되지 않은 면접

2013년 9월, 브뤼셀


그렇게 이름도 몰랐던 새로운 학교에서 나는 기적처럼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학교를 나와, 전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브뤼셀 시내를 조금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불리는 그랑플라스 (Grand Place)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고, 광장을 구경하며 와플과 감자튀김을 사 먹었다. 처음 먹어본 벨기에의 감자튀김은, 정말 눈이 동그래질 만큼 놀라운 맛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조금 식힌 후 숙소로 돌아와 내일 면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애초에 애니메이션 과를 쓸 생각으로 이곳에 왔었기 때문에, 가져온 포트폴리오 작업이 전부 디자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드로잉 작업들이었다. 이런 작업물을 가져가서 디자인 학과 면접을 볼 순 없었다. 당시에는 디지털 pdf 파일보다 인쇄된 이미지들을 더 선호하던 시기였고, 그나마 디자인에 가까운 내 작업들은 전부 프랑스에 있었기에, 결국 나는 무모하긴 했지만, 오늘 하룻밤만에 디자인 작업을 새로 싹 다 만들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없으니 깊게 아이디어를 짜낼 여유도 없었다. 최대한 프로그램 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임시 작업들을 만들어갔고, 깊이 있는 기획이 없으니 당연히 결과물들은 한없이 가벼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허접한, 정말 구색만을 맞추기 위한 작업들을 만들어 갔다. 머물고 있던 에어비엔비 숙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있는 프린터기를 써도 되냐고 허락을 구한 후, 기본 A4용지에 인쇄된 허접한 포트폴리오 북이 완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면접 예상질문과 답변지도 디자인 내용에 맞게 새로 다시 고쳐야 했다. 열심히 준비해 온 답변지에는 허접한 작업물들에 대한 조악한 의미와 내용들이 덧붙여졌고, 급하게 떠올린 디자인에 대한 개똥철학들로 채워졌다. 퀄리티 있는 내용을 준비하기에, 하룻밤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넣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면접을 보러 왕립예술학교로 향했다. 학교 2층 구석에 있는 Communication Visuelle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 아뜰리에 앞에 도착한 후 잠시 대기하자 곧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넓은 아뜰리에 안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교수가 나를 반겨줬다. 한 명은 긴 곱슬머리가 덥수룩한 해그리드 느낌의 여자 교수였고, 한 명은 대머리에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 교수였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자 둘은 내게 프랑스어를 하냐고 물어봤다. 적당히 한다고 겸손하게 답한 뒤, 포트폴리오를 꺼내 보여주었다.


전날밤 급하게 뽑아낸 디자인 작업과, 애니메이션용 드로잉 작업에서 그나마 쓸만한 것들을 빼와서 완성한 내 포트폴리오를 보며, 두 교수의 반응은 완전히 상반되었다.

우선 여자 교수의 반응은 완전히 시큰둥했다. 이게 디자인 작업인지 뭔지 자기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작업들을 더 이상 보기도 꺼려하는 반응이었다. 양심에 찔려 나 역시도 할 말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남자 교수는 다행이 꽤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디자인에 국한되지 않고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내 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남자 교수가 바로 학과장이었다.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둘은 내 작업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의견을 합의한 듯했고 내게 흥미롭게 잘 보았다며 면접 결과를 얘기해 주었다. 마지막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얼떨떨하게 있는데, 여자 교수가 물었다.


"우리가 뭐라고 했는지 이해했어?"

"아뇨, 사실 잘 못 알아들었어요."

"우리가 말한 뜻은, Ok라는 뜻이야."

나는 그때까지도 결과를 확신을 못하고 어벙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축하한다고, 넌 이제 우리 학생이라고."

그의 입에서 축하한다는 직접적인 단어가 나오자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얼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너무 절망스러운 일들만 당해왔기에, 확실하게 말해주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나 보다.

이렇게 한 번의 면접만을 보고 바로 합격했다는 사실에 얼떨떨한 나를 보고는, 교수들은 합격을 했다는 서류에 내 이름과 서명을 적고 내게 안심시켜 주려는 듯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이 서류 보이지? 이걸 학생처에 가져가서 제출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합격하는 거야. 얼른 가봐."

교수가 건네준 합격 서류를 품에 꼭 안고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 반복하며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낯선 벨기에라는 나라에 날아와서 거의 바닥까지 경험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회를 얻어 기적적으로 합격한 이 과정들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브뤼셀 왕립 예술학교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학과에 2학년 편입으로 합격했다. 무작정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프랑스로 온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 벨기에로 와서 한국에서 전공했던 디자인을 다시 공부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인생이란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학생처에 합격 서류를 제출하고 입학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히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학기가 바로 일주일 뒤에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저는 아직 여기에 집도, 비자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내 고생길은 겨우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013년 9월, 브뤼셀 학교 시험을 준비하며 머물던 숙소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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