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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Feb 11. 2023

15. 버려질 뻔한 입학서류

2013년 9월, 브뤼셀


처음 와본 두 번째 유럽국가 벨기에는 프랑스와는 또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프랑스가 조금 더 여성스러운 느낌의 건축 스타일을 지녔다면, 벨기에는 특유의 네덜란드, 또는 북유럽 풍이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특징이었다. 실제로 벨기에는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 3가지의 언어를 섞어 쓰는 꽤 복잡한 문화를 가진 나라이기도하다.

트램을 타고 미리 예약한 에어비엔비 숙소로 향하는 동안 브뤼셀의 거리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도시의 느낌이 또 새로운 유럽을 여행하는 느낌이 나서 설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우선 포트폴리오와 면접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드디어 프랑스에 온 이유이기도 했던 애니메이션 학교에 지원하는 만큼, 그동안 새로운 포트폴리오와 면접 예상 질문지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이 순간을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다음날 입학시험을 치르러 라 깡브르 (La Cambre)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브뤼셀에서 가장 큰 숲 중 하나인 깡브르 숲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 전망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화창한 날씨에 캠퍼스 느낌이 어렴풋이 나는 학교를 둘러보며 이런 곳에서 공부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들을 했다.


학교 건물 안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었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교수 한 명이 들어오더니 어떻게 찾아왔는지 물어봤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왔다고 말하니 이곳은 편입 시험을 치르는 곳이며, 입학 접수는 아래층에서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정보가 꼬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시험을 치르러 브뤼셀에 온 건데 이제 원서 접수를 받는 거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 교수가 설명한 대로 아래층에 있는 접수창구로 내려가 서류들을 제출했다.

창구 직원은 내 서류들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건 프랑스 서류 아냐?"

"맞아요 전부 프랑스어로 되어있어요 (번역할 필요가 없다는 뜻)"

"프랑스에서 발급받은 서류는 여기서 아무 쓸모가 없어. 벨기에 공증을 받아와야지."

"네? 하지만 전부 프랑스어로 되어있고 전부 효력이 있는 서류들인데요?"

"프랑스에서나 효력이 있겠지. 벨기에에서 이 서류들은 아무 효력도 없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창구 밖으로 차갑게 밀어내는 서류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오직 이 학교 하나만을 바라보고 여기까지 날아온 건데.. 비행기표, 숙소비, 전부 힘들게 마련해서 겨우 온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고?

나는 거의 나라를 잃은 것 마냥 얼빠진 얼굴로 학교를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동안 힘든 시간들을 꿋꿋하게 잘 버텨왔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냥 모든 순간이 다 원망스러웠다. 대체 뭐가 이렇게 힘든 걸까, 왜 단 하나도 쉬운 게 없는 걸까...


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브뤼셀 일정을 넉넉히 잡은 터라 돌아가는 비행기는 일주일 뒤에 있었고,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리면서 나는 붕떠버린 시간들이 그저 막막했다. 어떻게든 대안책을 생각해 보려 머리를 돌려도 도저히 답이 없었다. 참담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왔고, 반 포기 상태로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을 보는데 한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나와 발렁스 학교를 같이 다녔던 아는 동생이 브뤼셀에서 올린 사진이었다. 순간 신기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oo야, 너 지금 브뤼셀이야?"

"네 오빠, 저 학교 시험 보러 왔어요"

"와 이런 우연이 다 있네, 나도 지금 학교 시험 보러 브뤼셀에 와있어"

"대박 진짜요?ㅎㅎ 완전 신기하네"

"근데 다 망했어. 프랑스에서 발급받은 서류라고 학교에서 거절당했어."

"엥? 정말요? 제 서류는 다 받아줬는데?"

"정말? 너 어디 학교 지원했는데?"

"왕립 예술학교요. 저도 전부 프랑스에서 가져온 서류인데 문제없이 다 접수됐어요"

"진짜로??"

"네, 오빠도 여기 지원해 보는 건 어때요? 아 그런데 원서접수 오늘까지라서 서둘러야 돼요!"


대체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가 막힌 확률로 아는 지인도 브뤼셀에 혼자 시험을 보러 왔었고, 그가 올린 사진을 나는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발견했고, 그리고 연락을 하면서 그가 지원한 다른 학교에서 서류를 받아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원서 접수 마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다시 서류들을 몽땅 챙겨 숙소를 뛰쳐나갔다. 트램을 타고 가는 동안 급히 학교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애초에 브뤼셀에서는 애니메이션 학교만 검색했던 터라, 관련 학과가 없는 왕립예술학교는 내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애니메이션 과가 없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한국의 대학교에서 1학년을 보냈던 그래픽 디자인과를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학교 접수처로 달려갔다.


접수처에 있는 직원에게 깡브르에서 거절당한 서류들을 수줍게 내밀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서류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더니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나를 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너 서류들 다 확인은 했는데..."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거의 10년처럼 느껴졌다.


"보니까 프랑스 학교에서 1학년을 이수했네? 너가 원한다면 2학년 편입 시험으로 올려줄 수 있어. 굳이 신입학으로 지원하지 않아도 돼."


할렐루야. 발렁스에서 그나마 1학년을 이수했던 게 이렇게 풀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에게는 은인과도 같았던 그 직원(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교수였다)은 내 서류들을 편입용 지원 서류로 따로 분류하고는 시험 일정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신입학의 경우 며칠간에 걸친 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편입은 교수들과의 면접만 보고 바로 결정되는 시험이었다.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시험 일정과 장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쓰레기통에 버려질 뻔한 내 서류들은 그의 손에 넘어가 파일 안에 소중히 보관되었다.


나는 접수처를 나오자마자 무슨 청춘영화를 찍는거마냥 학교 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나왔다. 하루 만에 지옥에서 천당까지 왔다 갔다 했던 날이었다. 물론 아직 최종 합격한 것도 아니었고, 다음날 바로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프랑스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그날 하루만큼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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