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브뤼셀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브뤼셀 왕립 예술학교를 제외하곤 나는 프랑스에 지원했던 모든 학교에서 서류 탈락을 했다.
이로써 좋든 싫든, 결국 벨기에로 유학 국가를 옮겨야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의 입시 시스템은 9월 초에 입학시험을 보고 같은 달인 9월 중순에 학기가 바로 시작되는, 유럽에선 쓸데없이 드문 초고속 시스템이었고, 아직 집도 없고 비자도 없이 학교부터 덜컥 붙어버린 나는 황급히 이사부터 준비해야 했다.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었다. 브뤼셀에서 남은 며칠 동안 인터넷을 겨우 뒤져 일주일 뒤에 계약할 집을 구하고, 프랑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이삿짐을 쌌다. 은행계좌, 핸드폰 해지 등 그동안 열심히 이루어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이 나라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새벽에 브뤼셀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중간에 기차를 한번 놓치고, 잘못된 티켓으로 탄 기차에서 벌금까지 물었던 과정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프랑스에서 살림살이들을 전부 싣고 기차로 이사를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무모한 행동이었다.
어렵사리 브뤼셀에 도착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오늘부터 계약하기로 한 집이 갑자기 불발된 것이다. 빨리 어디라도 지낼 곳을 구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계약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었고, 기차 안에서 다시 계약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내 조건과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난 것이다.
갑자기 오갈 데가 없어진 나는 기차역에 있는 카페 한편에 짐을 전부 내려놓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장 오늘밤 어디서 자야 하지?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던 그때처럼 육중한 이민가방에 둘러싸인 채 나는 목적지를 잃었다. 이제는 전과 같은 고생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로운 나라에서 나는 또다시 원점에 와있었다.
집을 구할 때까지 호스텔이나 단기 숙소에 계속 지내기에는 상대적으로 더 비싼 숙박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참을 스마트폰을 뒤져 내가 발견한 방법은, 카우치 서핑 (Couch surfing)이라는 무료 숙박 서비스였다. 무료로 여행객들을 받아 집에 남는 소파나 간이침대에서 머물 수 있게 해주는, 그 당시 돈 없는 해외 배낭 여행객들에게 꽤나 핫했던 서비스였다. 문제는 서비스의 특성상 긴 날짜를 예약할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고, 길어야 하루에서 이틀정도만 이용할 수 있는 숙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날 밤에 머물 카우치 서핑을 당일에 겨우 구하고,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또 다음날에 머물 카우치 서핑을 겨우 구하는 식으로 하루하루 다른 집에서 독서실 메뚜기 (책 한 권을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빈자리에서 몰래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같은 삶을 살아갔다. 매일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면서 벨기에의 다양한 현지인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재즈 피아니스트도 있었고, EU본부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직업군이 정말 다양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브뤼셀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이긴 했지만 매일 집을 옮길 때마다 족쇄 같은 무거운 짐들을 끌고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이동해야 했고, 그때마다 타지에 머물 집이 없다는 설움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매일밤을 한숨으로 보냈던 당시의 심정은, 정말 무엇으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 괴로운 순간들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떠돌이 삶을 살아가다 겨우 구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브뤼셀에 시험을 보러 왔을 당시, 마지막 남은 며칠 동안 단기 숙박을 받아줬던 한국인 누나가 한 명 있었는데, 내 사정을 듣고는 본인 집에 다시 머물게 해 준 것이다. 그 누나의 집은 5명 정도가 같이 쓰는 셰어하우스였고, 고맙게도 거실 소파에 무료로 자리를 내어주었다. 다른 룸메이트들에게는 숙박비를 받고 지낸다고 속이며 나를 받아준 그 누나가 아니었더라면 집을 구하기까지 남은 날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냈을까 싶다.
9월의 브뤼셀은 아침저녁으로는 꽤 쌀쌀했고, 나는 매일 밤 그 누나가 건네준 캠핑용 침낭을 덮고 잤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며,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집 없는 삶이 꽤 지속됐다.
학기가 시작되고 2주 정도 지났을 때야 나는 겨우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브뤼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 사는, 치안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음침한 동네였지만 나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었고, 집주인에게 열쇠를 건네받았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프랑스에서 배편으로 보낸 침구류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며칠 동안을 겨울 옷가지를 덮고 자야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맘 편히 다리 뻗고 지낼 수 있는 내 공간이 생긴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걸 전에는 알지 못했다.
이제 겨우 내 집에 짐을 풀고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아직 한 가지 넘어야 할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벨기에 비자를 얻는 일이었다. 절차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에 문의한 끝에 내가 얻게 된 답변은,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 다시 한국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학교 수업이 한창 시작된 마당에, 비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한국에 가있을 수는 없었고, 여름에 프랑스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비행기 티켓을 두 번이나 구매했기 때문에 더 쓸 수 있는 금전적 여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막막한 상황에서, 나는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나기를 절실하게 기도해야 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