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브뤼셀
새로운 집, 새로운 동네, 그리고 새로운 학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사는 곳은 브뤼셀에서도 가장 작고 가난한 동네였지만 매일 아침 내 집에서 눈을 뜨고, 아침을 해 먹고, 학교 수업을 들은 뒤에 집에 돌아와 조용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했다. 그렇지만 결국 비자가 없이는 이 모든 게 바위 위의 위태로운 환상일 뿐이었다. 아직 내 프랑스 체류증은 만기까지 2-3개월 정도 남아있었고, 이 전까지 어떻게든 벨기에 체류증을 얻어야 했다.
대사관에 문의도 해 보고 주변의 한국 유학생들을 전부 붙잡고 물어봐도 하나같이 모두 한국에서 비자를 발급받고 와야 한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사실상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프랑스에서 건너왔다 한들, 나는 유럽과 아무 관련 없는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 새롭게 비자를 신청해 발급받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자 신청부터 발급까지는 보통 2-3개월 정도 걸리는 편이었고, 앞서 말했듯이 이미 학기가 시작된 시점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빼고 한국에 가겠다는 건 사실상 자퇴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미 이번 여름에 한국에 다녀왔기에, 또다시 지출을 반복하는 건 크나큰 부담이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왜 그때 한국에서 미리 비자를 받아오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나는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집 없이 떠돌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거운 고민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집을 구하는 건 발로 뛰면 언제 가는 해결될 일이었고 내 몸만 고생하면 되었지만, 이번일은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시스템들이 얽힌 행정적인 문제였고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그 어려운 과정들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결실이, 이 하나로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동안 고생한 것들이 쌓여 얼굴과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치 나라 전체가 내게 텃세를 부리듯, 쉽게 열어주지 않는 문 앞에서 나는 도대체 어디부터 두드려야 할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 유학생활을 통틀어 가장 괴로웠던 순간 중의 하나였던 이 경험은, 종교와 교리를 떠나 내가 신이라는 존재를 믿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내 길을 되돌아보면 결국 불가능해 보이는 큰 장벽 앞에서 한 톨의 기적 같은 상황이 뿌려지고, 그러면서 결국 올바르게 방향이 잡혀가는, 그러한 과정의 반복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한국을 가지 않고 벨기에 비자를 얻는 방법은 불가능해 보였고, 어떻게든 조언을 구하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있는 동네의 코뮌 (Commune: 한국의 동사무소 또는 구청과 비슷한 개념)에 방문했다. 워낙에 작은 동네라 다른 곳이라면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코뮌은 사람 한 명 없이 한산했고, 그 덕분에 나는 직원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구원자 같았던 그 남자 직원은, 그 어떤 유럽 관공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친절하고 세심한 마음씨를 지닌 직원이었고, 내 상황을 묵묵히 들어주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말이 없다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프랑스 체류증은 만기까지 얼마나 남았어?"
"한 2개월 정도 남은 것 같아. 그건 왜?"
"그래? 그렇다면 잠시만.."
그는 서랍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뭔가 불어로 리스트를 작성해 나갔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그 직원은 포스트잇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대략 6-7개의 서류 목록이 적혀있었다.
"여기 내가 적어준 서류 리스트들이 보이지? 지금부터 너 프랑스 체류증이 만료되기 전까지 이 서류들을 전부 준비해서 나한테 가져와. 그럼 내가 어떻게든 이 프랑스 체류증을 벨기에 체류증으로 전환해 줄게."
"그게 가능해..?"
"응. 대신 모든 서류들이 너 체류증이 만료되기 전까지 반드시 전부 준비되어야 해. 시간이 많이 없으니 서둘러서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꼭 도와줄게."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방법인 건지 확신이 잘 들진 않았지만, 그에게 몇 번을 고맙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반복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그 순간만큼은 그가 정말 하늘이 내려준 천사가 아닐까 생각까지 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동네의 코뮌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브뤼셀의 코뮌 역시 볼일을 보기 위해서라면 미리 약속을 잡고, 아침부터 줄을 서서 하루 반나절을 대기하며 겨우 창구에 있는 직원과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대부분의 직원들의 태도는 매우 불친절하며, 사정이 딱하다 한들 형식적인 답변만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이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행정일로 더 큰 코뮌을 방문하게 되었고, 이곳에선 전과 같던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아무튼 작고 가난한 동네에 있던 그 조그마한 코뮌은 마치 시골에 있는 정겨운 읍사무소처럼 외국인인 나를 사람답게 대해주었고, 정확한 행정의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이례적인 방법을 찾아준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나와 같은 선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가 요청한 서류를 전부 다 완벽히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소식을 기다리는 3개월의 시간은 불안함과의 싸움이었다.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인지 알 길이 없는 나는 그저 하늘에 운명을 맡긴 채 학교 생활에 집중했고, 3개월이 훨씬 더 지나 어느덧 체념하고 있을 때 즈음 어느 날, 나는 우편을 한통 받게 되었다. 체류증이 발급되었으니 찾으러 오라는 편지였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벨기에 비자를 얻고, 나는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해결된 상황에서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평범한 삶이 만들어지기까지 너무 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지만 나는 금세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각오를 다졌다. 새로운 학교에서 나를 증명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나가는 일 말이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