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브뤼셀
많은 일들이 지나고, 편입으로 들어간 브뤼셀 왕립 예술학교에서의 학기가 시작되었다.
아트, 디자인 두 개의 큰 옵션으로 나뉘었던 프랑스 보자르와는 달리, 이곳은 디자인, 조각, 회화, 사진, 건축, 판화 등 여러 개의 과들이 몰려있는, 쉽게 말하자면 종합 예술대학 같은 느낌이었다.
우선 학기가 시작되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학교 시간표가 생각보다 빡세게 짜여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리서치라는 명목으로 개인 아뜰리에에서 자유롭게 작업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브뤼셀의 학교는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시간표가 촘촘하게 메꿔져 있었고, 그중 더 충격적이었던 건 이론 수업의 양이었다. 프랑스 보자르에서 이론 수업은 'Culture generale'이라고 불리는 기초 문화 교양수업 단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2학년 시간표에는 철학, 문학, 기호학, 영화이론, 미술사 등 어마어마한 이론 수업들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들어야 하는 실기/교양 수업들로 가득 차있었다.
프랑스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제대로 쉬어본 적 없던 나는 브뤼셀 학교의 살인적인 스케줄 앞에서 더 빡세게 굴러다녀야 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 학교가 끝난 뒤에는 한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필 그 해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럽 순방이 있었고, 3일간의 일정 동안 관계자들이 식당에 몰아닥치는 탓에 하루에 100명가량의 손님을 맞아본 적도 있었다.
새 학교에서 적응하랴, 집 구하랴, 비자 준비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2학년 편입으로 들어온 유일한 뉴페이스이자,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내게 먼저 다가와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친구가 있었다. 마리라는 벨기에 여자애였다.
우리 학년에서 꽤 인싸 기질이었던 마리는, 어느 날 매일 강의실 뒤에서 혼자 앉아 수업을 듣던 내게 다가와 수업은 들을 만 한지, 뭘 하다 이 학교로 오게 된 건지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면서 나를 자연스럽게 학년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게 소개해 주었고, 수업에 어려운 부분이 있거나 공지가 있을 때는 늘 먼저 와서 챙겨주었다. 아시아 문화에도 꽤 관심이 많았던 마리는 어느 날 나를 직접 집으로 초대해 같이 사는 룸메이트인 틸과 토마를 소개해주었다. 벨기에에 친구가 별로 없던 내게 허물없이 다가와 큰 의지가 되어주었던 이들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는 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렇게 상냥한 마리와, 유쾌한 학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1학기 말 평가가 기다리고 있었고, 이론 수업 교수들은 학교 옆 인쇄소에서 시험 대비용 프린트물을 받아가라는 공지를 전달했다. 학년 친구들과 모여 인쇄소에 가보니 수업별로 대략 100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논문들을 나눠주는 게 아닌가! 이 논문을 전부 다 읽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봤고, 마리는 생각보다는 금방 읽힐 거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래, 너한테는 금방 읽히겠지...)
집에 돌아와 논문들을 하나하나씩 훑어보는데 한국말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철학적 내용들을 불어로 읽고 해석하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론 시험은 현지 언어를 쓰는 프랑스, 벨기에 학생들에게도 패스하기 쉽지 않은 까다로운 시험이었고, 한 페이지를 제대로 해석하는데만 몇 시간이 걸리는 내가 이 내용들을 정면으로 부딪혀 시험을 준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어릴 때부터 공부머리는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기에 나는 빠르게 편법을 찾아나갔다. 우선 논문에 나오는 인용 서적들의 제목을 따로 뽑아냈고, 뽑아낸 책들을 최대한 구글링 하여 한국어나 영어로 더 쉽게 설명되어 있는 리뷰글들을 찾아 대충의 핵심 내용을 파악했다. 어느 정도 내용의 큰 줄기가 이해되면, 다시 논문의 소제목들을 훑어가며 세부 내용들을 맞춰 나갔다. 어찌 보면 조금 겉핥기식이었지만 내가 찾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놀랍게도 이 방법은 시험에서 제대로 먹혔다.
동시에 전공 디자인 수업에서도 천천히 적응을 해나갔다. 이미 한국에서 디자인 전공을 1학년 했었기에 내 툴 실력은 나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감을 잡지 못해 어리바리했었지만 이내 교수들과 계속해서 논의하며 방향을 잡아갔고 작업들을 완성해 나갔다.
결국 1학기 마지막 과제평가에서 나는 학년 최고점을 받았고, 모든 이론 시험을 올 패스하며 동양인 유학생으로서는 흔하지 않은 쾌거를 달성했다. 집과 아르바이트가 해결된 후 점점 생활이 안정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겨울 방학을 맞았고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201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 이후로도 내 유학생활에 있어 괴로웠던 일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이만큼 힘들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영원히 기억에 남는 한 해이다.
학기말 시험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1월, 브뤼셀에서 열린 제이미 컬럼 (Jamie Cullum)의 콘서트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군대 있었을 때 친구의 추천으로 접하게 된 제이미 컬럼은 하루종일 그의 음악만 듣고 살 정도로 한동안 푹 빠졌었던 내 인생 1순위 아티스트였다. 특히 그의 노래 중 'High and Dry'라는 곡은 부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취침 전 이어폰을 꽂고 침대에 누워 전역 후 내 모습을 상상하며, 앞으로의 미래의 나를 떠올리며 눈을 감고 매일 밤 들었던 곡이었다. 노래를 듣다가 눈을 떠보면 여전히 내 앞에는 관물대와 생활관의 낮은 천장만이 보였고,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아담한 소극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제이미는 그 곡을 부르지 않았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나 역시 기립박수를 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밴드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대 밖으로 나간 제이미는 잠시 후 혼자 무대에 다시 등장했고, 피아노 앞에 앉아 홀로 떨어진 조명 밑에서 아무 말 없이 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High and Dry'였다.
그 어떤 밴드의 사운드도, 화려한 조명 효과도 없이 고요한 소극장에서 잔잔히 울려 퍼지는 그의 노래는 군대에 있을 때부터 해외에 나오고 싶어 늘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찾던 그때의 나와, 이곳에 오기까지 온갖 역경을 헤쳐왔던 지금의 나를 따듯하게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조금은 진부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이 곡을 선택한 제이미가 정말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느낌이었다.
해외에 나와보고 싶어 그동안 온갖 발버둥을 치던 나는 지금 내가 그렇게도 원하던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아직 그 당시의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순 없었지만 치열하게 버텨오며 힘겹게 얻어낸 이 값진 일상에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12월, 브뤼셀에 깊은 겨울이 찾아왔고, 나에게는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따듯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소중한 보상과도 같은 겨울이었다. (2부에 계속)
Jamie Cullum - High and Dry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