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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un 05. 2023

24. 맨땅에 헤딩

2016년 9월, 서울


불과 3주 만에 다시 돌아온 한국이었지만, 느낌은 전과 달랐다.

가족과 친구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유난을 떨며 돌아가던 게 민망했지만 이번엔 그저 쉬러 온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이제부터 하나하나 소화해야 할 수많은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마음가짐부터 새롭게 다잡아보았다.


한국에 다시 오자마자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의외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6개나 되는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직 사이트를 뒤져 이력서를 보냈고, 다행히 세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셋 다 면접을 보러 간 끝에 신사동에 있는 한 주얼리 브랜드에서 단기 웹디자이너로 일하기로 하였다. 주 2회만 출근, 나머지는 재택근무로 지금 내 상황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이었다. 일도 나름 재밌었지만,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이 되니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동시에 몇 달 전 브랜드 얘기를 나눴던 친구인 재영이를 다시 불렀다. 회사를 다니며 사이드 프로젝트에 목마름이 있던 재영이는 흔쾌히 전시와 브랜드 활동에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내가 한국에 들고 온 건 고작 7개 정도의 일러스트가 전부였고, 이것만으로 그 큰 규모의 전시들을 채울 수는 없었다. 재미로 소박하게 시작해 보자 생각했던 개인 브랜드 프로젝트였는데, 감당할 수 없이 찾아와 버린 기회들 앞에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한국에서 작업을 진행해 본 적이 거의 없던 디자이너였다. 이곳의 시세는 어떤지, 제작을 의뢰하기 위해 어딜 찾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아무런 감도 없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것. 우선 브랜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포스터, 스티커, 책자 등 비교적 제작하기에 난이도가 높지 않은 인쇄물부터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 우리는 충무로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쨌든 충무로는 인쇄의 메카로 알려진 곳이었기에, 이곳을 돌아다닌다면 무슨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 생각에서였다.

스마트폰을 뒤져 주변의 괜찮아 보이는 인쇄소들을 검색하고 무작정 찾아가 보았다. 이러이러한 형식의 인쇄물을 제작하고 싶은데, 단가는 얼마나 되는지, 제작은 가능한지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동네 인쇄소도 아니고, 알고 보니 충무로에 있는 업체들은 전부 대량 제작을 위주로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천 단위부터 시작하는 발주들을 취급하는 그들에게, 50에서 100장 정도를 얘기하는 우리들은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 수준이었고, 타박만 듣고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때 우리는 그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다 재영이가 온라인으로 발주를 넣을 수 있는 사이트들을 찾아냈다. 사이트를 통해 단가와 수량, 원하는 인쇄 옵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그곳은 마치 신세계 같았고, 다양한 업체를 통해 컬러 테스트와 감리를 여러 차례 진행해 본 끝에 하나씩 하나씩 우리가 원하는 최종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우리의 브랜드 에셋이 생겨나게 되었고, 몇 주 뒤 신사와 문래동에서 첫 전시를 가졌다.


처음으로 내 작업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볼 수 있었던 첫 두 전시를 마치고 들었던 생각은, '다음엔 더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인쇄물들로만 채워져 있는 평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내가 전하는 디자인 메시지와 철학들을 조금 더 브랜드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10월에 있을 부산 디자인 페스티벌, 그리고 12월에 있을 대망의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우리는 독립 패션 브랜드들처럼 의류, 액세서리, 굿즈 등 제품의 영역을 더 확장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동대문 시장과 방산시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동대문 시장에서는 원단과 액세서리들을, 방산시장에서는 포장지와 패키징 용품 등을 보러 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세세한 것들을 친절하게 알려주신 분들도 계셨고, 귀찮은 듯 상대도 하지 않는 분들도 계셨다. 제조업에 있는 나이 많은 분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벗어나 직접 부딪히고 혼나가며 배우는 이 현장학습은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큰 공부가 되었다. 발품을 팔아가며 여러 업체들을 둘러보고, 묻고 답하는 과정들을 겪게 되자 어느 정도 이 바닥(?)에 대한 감이 조금씩은 잡히기 시작했다.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있는 원하는 것들을 부르는 명칭들을 알게 되고 수량과 단가, 단위에 대한 기준들이 생기니 여러 업체들을 대상으로 비교가 가능해지고 우리가 원하는 제작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막대한 발품과 시간투자가 있었고, 제품 샘플을 뽑느라 드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뽑은 샘플은 때에 따라 실망스러운 결과물로 나올 때도 부지기수였고, 말만 번지르르한 제작업체에게 속아 돈을 날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9월 초, 서울/부산 디자인 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디자인 하우스에서 참가 디자이너들이 모두 모여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하고 싶은, 또는 이미 활발하게 활동 중인 쟁쟁한 디자이너들이 각자에 대해 소개하고, 프로필 사진 촬영을 마친 뒤 전시 안내 책자와 명찰, 도록을 건네받았다. 'Professional Designer'라고 쓰여있는 명찰 위 내 이름을 보니 이제 정말 뭔가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어 두근두근 거렸다. 브랜드 제품도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고, 분명히 멋지게 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슬슬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10월, 나는 드디어 첫 디자인 페스티벌을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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