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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May 23. 2023

23. 7개의 전시에 선정되다

2016년 9월, 브뤼셀


'나도 전시를 한번 해보고 싶다.'

브뤼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꿈에 그리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디자인과 학생이었지만 예술 학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순수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유독 많았다. 자연스럽게 타 과 친구들의 전시소식을 많이 접하기도 했고, 또 학교 내 기획 전시에도 자주 초대 되곤 했다. 이러한 학풍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 학과의 수업도 디자인과 아트의 경계가 흐릿한 프로젝트들이 많았고, 디자인이라는 탈을 쓴 채로 현대미술 같은 작업을 선보이는 동기들도 여럿 있었다. 어느 순간 나도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브랜딩이나 로고, 패키징 등, 그저 상업적인 디자인 작업만 해왔던 내가 전시를 한다는 건 꽤나 먼 얘기 었다. 심지어 다른 예술학과 친구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전시를 할 수 있는지 조언을 구하기도 해 봤지만, 욕심에 비해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전시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내가, 그 해 2016년 한 해에만 무려 7개의 전시를 하게 되었다. 


발단은 개인 브랜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면서 내가 작업한 아트웍이 몇 개 쌓이게 되었고,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벨기에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작은 로컬 전시에 지원해 본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동네 마을잔치 수준이었던 지역 전시 공모에는 큰 경쟁 없이 쉽게 선정될 수 있었고, 기차마저도 다니지 않던 그 시골 마을을 학교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갈 수 있었다. 트렁크에 실린 총 4점의 일러스트, 그리고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CD-ROM 작품으로 설치한 조촐한 구성이 바로 내 인생의 첫 전시였다. 


2016년, La Roche-en-Ardenne에서 열린 나의 첫 전시.


화려했던 (?) 첫 전시 데뷔를 마친 동시에, '그래도 브랜드라면 나름 제품이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브뤼셀의 싼 인쇄소를 뒤져 스티커와 배지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만큼 굿즈 제작을 저렴하고 깔끔하게 해주는 곳이 많지 않았기에 퀄리티는 상당히 떨어졌고, 스티커도 모양을 가위로 직접 잘라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프랑스에는 Portes ouvertes라는 연례행사가 있는데, 약 2,3일 간 학교를 외부에 오픈하여 학생들의 작업들을 공개하고, 편/입학정보를 안내해 주는 행사였다. 이때 교수의 허락을 받아 아뜰리에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위에 제작한 굿즈들을 올려놓고 1유로에 판매했는데, 역시나 보는 눈이 없던 벨기에 놈들은 단 한 개도 사가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스타일이 힙해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어떻게든 홍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무작정 다가가 브랜드를 설명하고 간절히 제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어설픈 학교 과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내 것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마치 자식처럼 뿌듯했다. 그렇게 매일 브뤼셀 시내를 돌아다니며 길거리에 스티커를 붙이고, 인스타그램을 홍보하며 누군가라도 내 브랜드를 알아봐 주길 바랐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대로, 이 맘 때쯤 우울증이 찾아왔다. 마음을 쉬일 겸 3년 만에 한국에 들어갔고,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내 브랜드 얘기를 하며 기회가 된다면 같이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들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친구 역시 관심이 있는 눈치였고, 나는 한국을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본 몇 가지 전시 공모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지원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무슨 생각이었을까 싶다. 그냥 브랜드를 한다는 걸 여기저기 티 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심지어 벨기에로 돌아가기 불과 몇 주 정도를 앞둔 시기였다.


브뤼셀에 돌아와 2달 동안 즐겁게 보냈던 한국의 기억들이 슬슬 옅어지고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럽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할 때쯤, 나는 메일을 확인하다 놀라운 소식들을 듣게 되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지원했던 전시 공모에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선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사와 문래동에서 열리는 작은 단위의 크리에이터 전시로 시작해서 코엑스와 벡스코에 열리는 서울/부산 디자인 페스티벌의 신진 프로모션 디자이너 전시까지... 난 그저 소박하게라도 전시 한 번만 해보는 게 소원이었을 뿐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국내에서 6개의 전시가 잡혀버린 것이다.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디자인 전시이다)


이쯤 되니, 처음 몇 가지 전시 선정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에이, 한국에 없어서 아쉽네'라고 생각했던 게, 점차 '어, 이건 진짜로 가야 되겠는데...?'의 마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고 9월부터 새로 시작하는 석사의 마지막 2학년이 기다리고 있었고, 약 5개월에 걸친 전시 일정을 소화하러 한국으로 돌아가기에는 일정상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찾아온 이 기회들을 절대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결국 교수와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석사 1학년때부터 진행해 온 작업들을 가지고 한국에서 큰 전시들을 하게 되었으니, 이 활동을 석사 2학년 한 학기 과정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디자인 페스티벌에 참여한다는 것과, 여러 디자인 멘토들의 지원을 받으며 브랜드 인큐베이팅 과정을 갖는다는 점, 그리고 학교 과제 수준이었던 프로젝트를 사람들 앞에서 실제로 론칭해 볼 수 있다는 점들을 어필하며 교수들에게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결국 열띤 논쟁과 (복잡한) 행정적 검토 끝에, 그들은 예외적으로 석사 한 학기를 외부 전시 활동으로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고, 나는 우습게도 한국에서 돌아온 지 약 3주 만에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야 했다. 앞으로 무슨 일들이 펼쳐질지 꿈에도 모른 채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으로 향하던 그때, 내 짐 속에는 달랑 7점의 일러스트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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