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방치할 때 처음으로 오는 것이 공황장애라면, 그 다음으로는 자해가 찾아온다.
자해는 청소년들의 우울 증상에 국한되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자해도 청소년 자해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청소년일 때 칼로 자해를 한 적이 있었을지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칼'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행위만을 자해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머리카락 뽑기, 벽에 이마 찧기, 뺨 때리기, 손톱 심하게 물어뜯기, 몸이 상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일도 자해로 포함시킬 것이다.
신체가 얼마나 손상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신체에 손상을 줌으로써 감정을 해소하려는 행동' 전체를 자해로 분류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다만 이해를 위해 '모든 신체적인 손상'을 '상처'로 통칭하겠다).
나는 청소년일 때 자해중독이었다. 자해 외에 즉각적으로 우울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정신과에 내원하기 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자해를 했다.
그렇게 많이 자해를 했지만, 과다출혈로 죽을 만큼 상처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맹세컨대 죽으려고 자해를 한 적은 없었다. 정말 자해로는 죽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비자살성 자해'를 하는 우울증 환자들 중 하나였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째서 자해를 하는가?
내가 자해를 했던, 또 자해중독이 되었던 이유를 말하겠다. 아주 단순하다.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에 했다.
우울, 분노, 자괴감, 피해망상, 공황 등 온갖 파도가 나를 덮치고 있을 때 자해를 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기분이 나아진다는 것이 행복해진다거나 기뻐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온갖 파도에서 벗어나 나를 일상으로 되돌려 놓는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이 바로 자해였다.
사실 자해를 했을 때 기분이 나아지는 데에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
'자해를 할 때 뇌에서는 마약성 진통제와 비슷한 성분의 물질들이 분비된다. 우리가 몸 어딘가를 다쳤을 때 당장 심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진통효과 덕분이다. 그러니 긴장되고 두렵고 우울한 감정들이 자해를 통해 일시적으로 위안을 얻게'* 된다.
물론 내게는 심리적인 사유도 있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마땅히 받았다는, 마치 숙제를 해결한 듯한 해방감과 안정감이 있었다. 또 본래는 타인이 내게 주어야 할 벌을 직접 해냈다는 만족감도 컸다. 자해하는 사람들에게 제각각 특정한 심리적 사유가 적용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해는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닐가? 진통효과도 주고, 진정도 되고, 해방감과 만족감도 주고. 어차피 상처가 남는 것은 남의 몸도 아니고 내 몸인데 왜 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앞으로도 이 몸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금만 상처를 내도 기분이 나아진다. 하지만 몸은 자극에 적응한다. 그래서 다음번 자해로 기분이 좋아지려면 더 크게 상처를 내야 한다. 그렇게 더 깊은 상처, 더 많은 상처가 생긴다. 나는 때로 자해를 하고도 만족할 만큼 상처가 크지 않으면 몇 번씩 다시 하고는 했다. 도자기 장인처럼 말이다.
이렇게 상처가 점점 늘어갈 경우 당연히 감염 위험이 있다.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의 신체적 손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고립되면, 자기효능감과 자아존중감을 잃는다. 그러면 더 우울해진다.
자해한 후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에는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자해 직후에는 생물학적인 반응으로 기분이 나아졌다가도 이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행위이며,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상처를 볼 때마다 우울해지는 것이다. 즉각적인 심리적 진통 효과를 주었던 자해 때문에 오히려 우울의 바다에 표류하는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에는 자해 없이도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는 브로마제팜정 한 알이면 온갖 감정적 파도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사람에 따라 처방에 차이는 있다). 만약 내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우울증 응급처치법 과 우울증 민간요법 병행을 통해 우울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익혀 보자.
위와 같은 방법들을 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비자살성'으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자해일 뿐이라 해도, 자해는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앞으로 내 몸 안에서 살아갈 미래의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갈 장소인 몸을 중요치 않게 여기는데 정말 그것을 '비자살성'이므로 괜찮다고 인식해도 될까?
이런 식으로 자해와 우리의 건강한 삶은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자해를 통해 우울감을 버티고 있다면 자살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꼭 내원하자.
나는 자해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먹으라고 준 필요시 약인 브로마제팜정을 먹고 나서 생각했다.
그 온갖 파도가 이 핑크색 알 하나로 해결되다니.
더 일찍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우울증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는데.
자해를 추가할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당신은 나보다 더 일찍 건강해질 운명을 타고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찾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는 10년간 이 글을 찾지 못했다. 병원에 가라고 독려한 글도, 자해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울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적은 글도 읽지 못했다. 그래서 '정신병 안아키'로 살았고 고통의 시간이 길었다.
당신에게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나보다 더 일찍 병원에 가고, 더 빨리 우울감을 해소할 수 있는 건강한 방법을 배울 기회가 말이다.
이것은 자해중독에서 벗어나 브로마제팜정을 먹은 미래의 당신으로부터 온 유리병 속 편지이다.
그리고 당신은 방금 이 편지를 다 읽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더 편하고 더 행복하게 삶을 보낼 수 있다.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