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1. 메모리 부족 (Low memory)

조수영 [1테라바이트]

by 나식언

조수영 [1테라바이트]



“가치 효율제로 인한 메모리 할당제가 시작된 지 99년을 맞이했습니다. 국가는 이전보다 양질의 데이터를 6배 이상 축적한 것으로 확인되며.....”


야, 한지민, 듣고 있어? 간호사가 너 동면 완전히 깰 때까지 눈 감으면 안 된대, 그니까 정신 차려. 백 년 동안 바뀐 거 얘기해줄게, 모르면 살 수 없으니까.


지금 우리의 세상은 ‘메모리 할당제’로 인해 1인당 일 테라의 기억공간을 가지고 태어나게 돼. 일 테라가 채워지게 되면 맨 끝에 메모리부터 삭제되는 로직을 가지고 있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삭제되기 전 특정 기억을 정말 삭제하고 덮어쓰겠냐는 팝업이 뜬다는 거야. 어디에 뜨냐고? 눈앞에, 아닌가? 그냥 당연하게 보여.

만약 아니요를 선택하면 그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자신에게 쓸모없는 기억을 골라 삭제하게 돼. 삭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어떻게 되진 않아, 대신 죽을 때까지 어떠한 기억도 저장하지 못한 채 팝업창이 뜬 채로 서 있겠지?


일 테라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자면, 아주아주 적은 양이야. 만약에 오늘 예전보다 훨씬 맛있는 초밥을 먹었다면 기쁜 감정, 음식의 생김새, 가게 위치, 냄새와 향기 등등 부수적인 요소와 함께 저장되어 거의 20MB의 메모리를 잡아먹지.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용량은 무제한으로 제공 받아, 하지만 공부에 감정이 섞이는 순간 데이터가 돼, 서로 좋아하는 애들 둘이서 공부를 하는데 손이 스친다? 그래서 공부 외에 다른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건 공부 데이터가 아닌 감정 데이터로 잡혀, 이해하지?


용량을 늘리면 되지 않냐고? 할당제 초반엔 오십 테라까지 가능했어. 마치 예전 휴대폰 저장용량을 늘리듯 일 테라 추가, 오 테라 추가, 가격은 일 테라당 6억. 서민들은 꿈도 못 꿀 가격이었지, 하지만 돈 있는 사람은 당연히 몇십억이고 투자했고, 사람들이 작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좀비처럼 멈춰 이 기억, 저 기억을 삭제하느라 몇십 분을 허비할 동안 부호들은 좋은 것, 기쁜 것을 가리지 않고 즐겼어.


하지만 지금은 용량 추가가 불법이야. 서민을 위해 메모리 할당제를 폐지하라고 크게 외치던 이치선 국회의원이 자신의 부인과 자식의 용량을 30억씩 늘린 게 밝혀졌거든. 우리 같은 서민들은 자신의 메모리를 몇 기가씩 써가면서라도 이치선 국회의원이 벌을 받길 원했어. 자신의 메모리를 잠식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돌을 던졌지, 몇 주 후에 이치선의 가족들은 자신의 집 발코니에서 추락했어. 이후 사람들은 두 파로 갈렸지, 돈을 써서 자신이 아닌 가족들이라도 편하게 살라고 했던 거 아니냐, 그게 죽을죄냐 혹는 시민들을 위해 메모리 할당제 폐지를 외치면서 가족들은 평생 쓸만한 메모리를 구입한 괘씸죄를 어떻게 용서하냔 파로 나눠 싸웠지.


이후 국가는 용량 추가를 불법으로 못 박아버렸어. 이미 늘렸던 사람들도 일 테라로 강제로 줄여버렸지. 이미 추가 한 부자들은 이치선 꼴이 날까 항의도 못 했어. 그 사람들 지금까지 어떤 기억을 삭제할지 고르고 있을걸? 그러고 보니 부럽다. 넌 이게 처음 데이터잖아?


용량 중에는 ‘감정’이 제일 크게 차지해, 어떤 사물의 생김새나 단순 사건은 거의 잡아먹지 않는다고 봐도 돼. 슬픔, 기쁨, 행복, 불행, 증오, 등등이 가장 많이 잡아먹지,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한 기억만을 원하니 불행이나 증오 같은 감정은 지우겠지? 그게 메모리 할당제의 장점이야. 보통의 사람들은 나쁨과 불행은 지워버리지.

메모리가 모자라지 않아도 굳이 시간을 써서 짜증 나는 건 없앨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감정만 지울 수는 없어, 그 메모리를 통째로 지워야 하지. 예를 들어 말해볼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고통스러워 그 기억을 지우잖아? 그럼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기억 자체가 삭제돼. 대체 엄마가 어디 갔는지 평생 찾게 될 거야. 꽤 잔인하지? 그래서 해결책이 생겼어. 기억을 ‘압축’하는 거야. 압축하면 기억은 아주아주 작게 남게 돼. 그게 무슨 말이냐면 ‘엄마가 돌아가신 사건‘만 남게 되는 거야. 감정은 하나도 없이 사실만, 데이터로만 남게 되는 거지.


이 쯤 되면 궁금할 거야. 사랑은 어떡해? 사랑은 좋은 기억만 남잖아. 사랑이란 건 행복하잖아. 그럼 메모리가 금방 찰 텐데. 맞아. 사랑은 메모리 할당제에 제일 큰 부작용 같은 거야. 연인들은 만나면 다음 기억을 위해 소중한 기억을 삭제했지. 난 이걸 지울 거야, 싫어, 이거 말고 저걸 지우자, 엄청나게 싸워댔어. 오래가는 커플은 없다시피 해. 그러니 당연하게도 저출생이야. 일 년에 태어나는 아이가 100명이면 많은 거지. 아이를 낳으면 메모리가 엄청나게 잡아먹힐 거라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래서 국가가 내놓은 정책은 부부 메모리 할당제였어. 혼인신고를 하게 되면 두 사람의 메모리가 동기화되는데, 2년간 10테라로 늘려줬지. 3년 차부턴 3테라로 줄어들고, 아무래도 신혼이니까 메모리가 많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결혼하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 아이를 낳으면 1년간은 또 10테라, 2년 차부턴 3테라. 그러니 부부들은 3테라의 기억을 공유하며 살게 되는 거지.


물론 초반엔 아주 좋았어. 10테라면 어마어마하거든,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음껏 누려도 돼. 하지만 나쁜 기억을 삭제하려면 두 사람의 합의가 무조건적으로 필요했지.

문제는 이혼할 때였는데, 이혼하게 되면 바로 일 테라씩으로 재설정이 돼, 아, 양육권이 있다면 이 테라야. 그러니 법정에선 누구의 어떤 기억을 지울 건지가 최대 쟁점이지. 이혼하는 마당에 내 행복한 기억까지 지우고 싶겠어? 그러니 이혼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어. 아, 만약에 상대방의 완전한 귀책 사유일땐 내 좋은 기억만 빼고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 기억과 추억은 몽땅 지워버릴 수 있었어. 한때는 사랑했으면서, 좀 그렇지?


그리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데이터 있잖아? 천재들이랄지.... 과학자들이랄지.... 법이랄지.... 너 법이 뭔지 알지? 이런 중요한 데이터들은 국가가 관리해, 그런 사람들은 몇 테라의 데이터가 더 허용되는 거지. 당연히 불공평하다는 얘기가 나와, 나도 회사 다니는데 저들만 왜 특혜를 주냐. 그러다 큰일이 났어, 사람을 싣고 달에 가는 파릴호가 발사 며칠 전 데이터가 싸그리 지워지는 사건이 난 거야. 사람들이 자꾸 저들만 특혜를 받아간다고 멋대로 신상을 노출하고 노발대발하자 화가 난 연구진이 보란 듯이 데이터를 싹 날려버린 거지. 발사 직후 알았대, 계산한 궤도 데이터가 싸그리 바뀌어있던걸, 다 죽었지 뭐, 그 이후에 중요 데이터는 국가가 관리하게 된 거고.


질문을 줄게, 만약 내가 너에 대한 기억을 지우면 너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답은 땡! 아니야, 네가 지우지 않았다면 날 완벽하게 기억해. 그럼 너와 나의 기억이 서로 다르겠지? 너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새로운 기억을 쌓는대도 찝찝하겠지. 너는 너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헷갈릴 거고. 그래서 기억을 지우는 데 합의가 필요하다는 거야. 강제는 아니지만.


‘아이가 주는 행복에 메모리가 아깝지 않아요, 아이 낳기 전 기억을 모조리 삭제하고 싶어요,’


한 사건에 대한 메모리는 스스로 지울 수 있지만 데이터를 대량으로 삭제하는 건 국가 공인 업체에서만 가능해. 갓 출산한 산모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온대. 그렇지만 부부는 공용데이터니 같이 오세요, 하면 안 온다더라, 합의가 안 된 거겠지.


아이의 기억은 13살까지 부모가 관리할 수 있어. 그래서 요즘 부부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모든 기억을 압축하는 게 트렌드래. 돌잔치, 생일잔치, 어린이집 장기자랑도 압축해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게 하고 케이크의 달콤함, 깔깔대며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압축해 버리지. 요즘에서야 사회문제가 됐어 ‘청소년 감정 불감증 기하급수적으로 상승’ 부모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압축된 걸 하나하나 풀어줘, 그렇게 하라고 육아 책에도 나와 있대.

근데 있잖아, 아이들에게 자신의 돌잔치가 막 기억하고 싶은 내용일까? 4살 때의 생일잔치를 굳이 궁금해할까? 아이들은 메모리가 부족하니 삭제를 원하지만, 부모들은 받아들여 주지 않지. 요즘 아이들은 압축된 감정이 성인에 비해 10배가 넘는다고 해, 13살이 되면 스스로 ‘기억 초기화’를 하는 게 요즘 반항아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하더라. 그럼 아이의 기억은 최소한의 기억 빼곤 아무에게도 없는 게 되겠지. 그래도 요즘 애들은 엄청나게 똑똑해, 지식만으로 꽉꽉 채워놨으니까.


‘메모리 가성비’ 요즘 뜨는 키워드야. 아무리 좋더라도 감정 없이 기억만 남게 하는 거지. 그리고 모든 걸 저해상도 흑백으로 설정해. 그럼 메모리가 70퍼센트 정도 줄거든. 막상 떠올리면 지지직거리고 초점도 나가고 색깔도 없이 밋밋하지만 그래도 까먹진 않으니까 대세야. 오죽하면 어두운 밤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겠어. 이미 어둡게 저장된 걸 더 어둡게 처리해 용량을 줄여보겠다는 거지.


맞다, 어제 뉴스에서 본 건데 메모리가 해킹되기도 한다더라? 팩트체크는 안 됐긴 한데 들어봐. 어떤 여자가 새벽에 분명 남아돌던 메모리에 갑자기 알람이 뜨더니 미처 고를 시간도 없이 기억들이 밀고 들어와 맨 처음 기억부터 사라졌다는 거야, 그 여자의 일기를 보니 어릴 적 디즈니랜드에 갔던 추억,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 같이 중요한 것도 기억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마지막 기억이 어떤 사람들이 자기를 강제로 어두운 방으로 데려갔다는데.... CCTV를 확인해 보니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았대. 세계 메모리 협회 WMA가 해킹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어. 관종이라고 욕을 엄청 먹고 있더라.


지민, 아직 졸리구나, 그럼 내 기억에 처음을 알려줄까? 백 년 전에는 몰랐는데, 할당제 시작 후엔 태어날 때부터 기억이 나더라, 근데 내 첫걸음마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지워버렸어. 6살 때 피아노 콩쿠르에서 일등을 했었어. 미뉴에트 G장조를 쳤지. 근데 준비를 한 건 기억이 안 나, 그냥 빨간 커튼 앞에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뚱땅거리는 장면, 트로피 하나를 들고 사진을 찍던 장면, 딱 두 개만 기억나. 압축이 된다는 건 이런 거야. 좋았었는지 어땠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사건만 있을 뿐이야.


이제 나도 곧 1테라가 꽉 찰 거라 어떤 걸 지워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메모리 가성비를 따져서 추억은 거의 압축해 놓았거든, 근데 연애에 대한 건 지우기가 너무 어렵더라.


김경우는 내 첫사랑이야, 걔는 나한테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내가 막 들이댔지. 걔가 뭐라는지 알아? 미안한데 너한테 쓸 메모리가 없어서 연애를 못 하겠대. 엄청 상처더라. 그다음 날에 와서 자기가 어제 다른 기억을 많이 삭제했는데, 네가 아직 내 메모리를 가지고 있으면 만나보자고 하더라고. 난 오케이했지. 난 솔직히 메모리가 차면 지우는 게 되게 쉬웠거든? 막상 연애를 시작하니까 그게 정말 어렵더라.

게다가 사랑이잖아, 사랑 안엔 기쁨도 행복도 포함된 거라 용량이 되게 커. 김경우도 나도 메모리를 아끼자 주의라 잘 맞았지. 맛없는 식당에 가서 데이트 하면 같이 삭제하고, 영화가 재미가 없으면 그것도 삭제하고. 좋은 기억만 서로 같이 간직했지. 초반엔 되게 의견이 잘 맞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오늘 갔던 레스토랑이 너무 맛없어서 지우자고 했는데 걔는 너무 맛있었대. 지우지 않기로 했지, 그 이후부턴 의견이 안 맞더라고. 나는 오늘 너무 행복했는데 걔는 기억할 만한 정도는 아니라 집에 가서 삭제할 거래. 이렇게 기억하는 정보가 달라지더라? 한 달 전 갔던 고깃집에 다시 가자고 했는데 기억을 못하더라고, 또 오늘 입은 옷이 별로래, 네가 골라 준거잖아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대. 점점 삐걱댔지.


내가 울면서 말했어. 제발 삭제를 하려면 같이 지우자고, 너랑 나랑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고. 걔가 그러더라. ‘너도 가성비 챙기는 거 아니었어?’ 그 말에 정신이 들었지 뭐. 얘는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우리는 끝났어. 걔는 어디까지 지웠는진 모르겠지만 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지웠거든. 음, 꽤 행복했어. 그래서 벌써 용량이 다 찬 거겠지. 지우는 데 한참이 걸릴 텐데 고민이야.


글-나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