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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소한 것에도 설렘은 시작될 수 있다

아이들과 남은 시간 D-9년, 두 번째 이야기

by 스테디김

월요일 저녁 9시쯤. 나는 아이들과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 요즘 최소공배수와 통분의 늪에 빠져 있는 쌍둥이들. 아이들은 최소공배수, 최대공약수, 약분, 통분이 도통 헷갈리는 듯하다. 주관식 문제 앞에서는 뇌가 정지한 듯 미동도 없다. 뇌사 상태에서 구해주기 위해 나는 둘 사이를 열심히 오가며 열을 내고 있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몰입한 나머지 제이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제이의 몸이 식탁 가까이 와서야 그가 온 것을 알았다. 제이는 사이렌 로고가 크게 그려진 스타벅스 종이가방을 들어 올려 나에게 내밀었다.


"어? 이게 뭐야?"


나는 물어봄과 동시에 종이가방을 들여다보았다. 비스코티 크래커와 홀리데이 쿠키가 예쁜 틴케이스에 들어있었다. 봉지나 종이에 쌓여있는 쿠키가 아닌 예쁜 틴케이스에 들어있는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이는 쿠키. 예쁘게 포장된 쿠키 선물을 두 개나 받으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듯, 로맨틱한 연말 느낌에 기분이 몽실몽실해졌다.


아이들과 수학공부만 하다가 계산기가 될 뻔한 나의 AI감성이 촉촉해지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잠깐, 내 돈 주고 사 먹을 일 없는 이 귀한 물건을(나는 이런 종류의 것은 선물의 용도로만 만들어진 줄 알았다) 들고 온 것이 뭔가 수상하다.


"이거 누구한테 받은 거야?"


"아니,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일부러 가서 사 왔지."


"어? 정말?"


"응, 요즘 내가 이벤트를 예전만 못 해준 것 같아서."


순간 나는 갑작스레 훅 들어온 설렘공격에 무장해제되었다. 기념일마다 이벤트를 항상 챙겨주는 다정한 제이. 치밀한 나의 성향상 어느 정도 제이의 이벤트는 예측가능하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의 바람대로 감동적 인척 하지만 실은 살짝 연기가 들어간 것(가정의 평화를 위해 연기는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대학 때 연극동아리에서 많은 날을 지새운 덕에(곧 죽을 시한부 역할로 전국연극대회도 나갔다. 이미지 캐스팅으로..) 어느 정도 메소드 연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전혀 예측조차 못한 깜짝 선물에 연기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제이는 요즘 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고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심지어 오늘은 야근으로 멀리까지 다녀오고 늦게 귀가하는 길. 물리적, 육체적으로 누군가를 챙기기 힘든 사람에게 챙김을 받으면 그 감동은 크기를 측량할 수 없이 크다.


제이는 항상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나를 먼저 따뜻하게 챙겨주었다. 그런 작은 챙김과 사랑은 '신뢰와 자존감 은행'에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 큰 문제 앞에 의연하게 나를 잡아주는 구실을 하였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들이 내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유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성실하게 살고 싶은. 그 사람도 나를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너 생각을 계속했어. 그리고 뭔가를 사주고 싶었어. 늦은 시간이라 살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내 생각을 하고 무엇을 사줄까, 한참 생각을 했다?(갑자기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쿠키세트에 불과하지만 몇 십만 원짜리 목걸이보다 가히 효과가 강했다.


요즘 잔소리가 극심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제이의 세렝게티 초원의 들짐승같이 야생적인 행동들이 야기한 잔소리다. 예를 들어 2인분이면 충분한 파스타를 5인분 어치를 만들어 절반은 버린다거나(그것조차 소스양도 제대로 못 맞추어 맛도 형편없다) 평일에도 저녁 한 끼로 혼자서 통닭 한 마리를 몰래 먹거나(내가 외출하면 어김없이), 공부하는 애들과 놀아서 숙제를 못하게 한다거나.


여하튼 요즘은 '나 혼자 산다'를 꿈에 그리게 할 만한 세 남자의 정글 속 모글리 같은 행동으로 나는 신경쇠약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깜찍한 일을 할 정도로 아직 제이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제이가 갑작스럽게 넷플릭스의 설렘 유발 남자주인공처럼 멋있어 보인다.


바쁘지만 아내를 위해 뭔가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 바쁘지만 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사람.


"여보, 어쩔 수 없이 여보는 돈을 좀 써야겠다.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졌어."


"이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면 매일 살 수도 있지."


어제는 심장마비를 부르는 냉탕, 오늘은 얼굴 근육이 다 풀어지는 온탕.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즐기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데 거기서 위안을 받는다. 온탕만 있다면 온탕이 정말 온탕인 줄 모를지도. 그러므로 냉탕도 어느 정도 필요한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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