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축제가 열린다. 이번 축제는 어린이 사생대회도 함께 열린다. 미술학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서준이도 사생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휴일이기에 온 가족이 야외에서 피크닉 겸 축제도 즐기고 그림도 그리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서준이는 사생대회와 관련하여 아픈 기억이 있다. 지난해에 처음으로 대규모 사생대회에 참가하였고 작품이 좋았는지 원장님으로부터 상위권 수상이 기대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나도 내심 기대를 품었는데 정작 수상자 명단에 없었다. 수상자 명단을 확인하고 실망하여 미술학원 원장님과 통화를 했다. 원장님도 이상하다며 마지막에 물었다.
“어머니 혹시 그림 뒤에 인적사항을 쓰셨어요?”
그렇다. 쓰지 않았다. 사생대회는 처음이고 학원에서 함께 나갔기 때문에 원장님에게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같은 날 다른 곳에 일정이 있어 뒤늦게 도착하여 인적사항 설명을 듣지 못한 나의 탓도 크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서준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정성껏 완성한 그림에 인적사항을 쓰지 않았다니. 그때의 실망을 오늘 기필코 만회해야 한다. 이번에는 민준이도 함께 도전하기로 했다.
10시에 시작하는 사생대회. 우리는 9시쯤 도착했다. 아직 사생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사생대회는 자리가 생명이다. 햇볕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2~3시간 동안 편안하게 그릴 수 있다. 잘못했다가는 땡볕에 의도치 않은 선탠과 기미 주근깨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일찍 온 것이다. 좌식 테이블이 흔들리지 않는 평평한 곳과 나무 그늘이 넓게 드리워져 있는 곳. 그곳을 찾아야 한다.
축제를 준비하는 인원은 많이 와 있었으나 어린이 사생대회 인원은 우리가 처음이다. 우리가 제일 좋은 곳을 선점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온 사람으로서 선택권이 넓다. 예상한 대로 평평한 곳, 나무그늘이 넓고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캠핑에 사용하는 폭신하고 넓은 매트를 깔고 좌식테이블을 펼쳤다.
사생대회 시작 시간이 되어 화지 2장을 받아왔다. 주제는 자유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하여 어떤 것이든 좋다. 서준이가 먼저 ‘신나는 마을축제’로 주제를 정한다. 그러자 민준이도 ‘마을축제’로 주제를 정한다. 둘은 언제나 누군가 뭔가를 시작하면 나머지 한 명이 따라 하는데 살짝 다르게 하여 따라 하는 게 아니라고 극구 주장한다. 그리고는 심하게 견제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둘은 같은 테이블에서 그리고 있지만 서로 아이디어를 뺏기지 않으려고 물통으로 교묘하게 화지를 가리고 있다. 미술혼 가득한 서준이는 연필로 쓱쓱 스케치를 시작한다. 민준이도 거침없이 그려나간다. 민준이 역시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단, 그리는 것만 좋아하지 실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 서준이는 특유의 감성을 가득 담아 그려 나갔다.
그 사이 제이와 나는 먹을거리를 사오기로 했다. 이번에 참가한 사생대회는 마을축제도 함께 하기 때문에 먹을거리, 볼거리가 풍성하여 전혀 지루할 것 같지 않다.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딱 보아하니 민준이 그림은 애초에 글렀다. 마음속으로 메인 이벤트인 서준이가 좋은 작품을 내기를 기대해 본다.
나는 서준이의 그림을 서포트했다. 유명화가의 조수가 된 것처럼 서준이가 칠하라는 색으로 채워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살을 간지럽힌다. 뺨을 스쳐가는 가벼운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자연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온갖 생각들은 가라앉고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그림만이 남는다.
제이는 민준이를 도와주고 있다. 스케치를 도와준다고 지우개로 그리고 본인이 그렸는데 민준이가 한 것보다 더 형편없다. 민준이가 화를 냈다. 그에 반해 예술팀인 우리는 평화 그 자체이다. 나는 서준이의 지시에 따라 색을 칠하는 조수의 임무에 충실했다. 민준이도 서준이가 자신보다 그림을 훨씬 잘 그린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수상욕심은 있는 듯 열심이다. 그에 반해 그림은 영 엉망이다.
서준이는 오랜만에 진지하고도 전문가스러운 모습으로 그림에 집중한다. 공부할 때와는 딴판이다. 공부에서 항상 민준이에게 밀린 것에 비해 지금은 너무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리고는 중간중간 민준이와 제이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는 피식 비웃는다. 나는 서준이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오후 1시가 되어 마감시간이 되었다. 일찌감치 마친 민준이와 제이팀과 다르게 서준이와 나는 마감시간 직전까지 디테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민준이와 제이는 딱 보니 망한 거 같다. 본인들도 그것을 알았는지 막판에는 대충 마무리하고 먹기나 하자, 이런 식인 것 같다. 계속 먹을 것을 사 나른다. 비빔밥, 부침개, 아이스크림에 이어 닭강정만 두 번째 사 오고 있다. 중간중간 과자랑 음료수까지 먹은 걸 생각하면 그림을 그리기보다 먹으러 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듯하다.
우리 팀도 마침내 그림을 제출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로이 축제를 즐겼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모를 여학생들이 걸그룹 못지않게 멋지게 춤을 췄다. 우리 바로 앞줄의 할아버지는 여학생들이 춤을 추자 고개를 미어캣처럼 하고 초집중한다. 앞의 순서로 할머니들이 라인댄스를 추고, 초등학생 아이들이 음악줄넘기를 할 때는 분명히 졸고 계셨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앞줄의 어떤 꼬마가 일어섰다 앉았다 하자 할아버지가 안 보인다고 꼬마에게 화를 냈다. 아이가 기가 죽어 앉자 할아버지는 하던 데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성숙미 넘치는 춤을 추는 여학생들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나참,.
모든 행사가 끝나고 대망의 사생대회 수상발표 순서가 되었다. 수상자는 작품을 액자화해서 만들어주고 소정의 상품권도 준다고 했다. 민준이와 서준이는 사실 이 상품권이 탐났기에 출전한 것이다. 요즘 자산 불리기에 관심이 많아 돈을 벌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열심히 한다. 좋은 자세이다. 우리 넷은 저마다 긴장하고 있다. 장려상이 호명된다. 우리 아이들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우수상에 서준!”
서준이 이름이 불렸다. 서준이는 언제 뛰어나갔는지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만세를 하며 빠른 속도로 강단을 향해 뛴다. 강단에 올라 꽃다발을 안고 너무도 환한 미소,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우리 쪽을 찾는 것 같았다.
상을 타고 내려온 서준이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서준이를 꼭 끌어안고 축하한다고 했다.
“서준아 너무 축하해~! 너무 잘했다! 수상대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서준이는 순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귓속말로 얘기했다.
“엄마, 사실 나는 이 한 가지를 생각했어.
보고 있느냐 민준아, 내가 이겼다."
나는 폭소를 했다.
그러고 보니 민준이는 어디 갔지? 우는 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 민준이는 대성통곡을 하며 제이에게 안겨 울고 있다.
오늘 축하파티는 물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