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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Oct 24. 2022

가을이 왔다. 난 살짝 맛이 갔다.

2012. 9. 17

20대의 조미지가 살아간 기록. 
불안과 희망이 한데 뭉친,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편린.




Date : 2012.09.17

가을이 왔다.

난 살짝 맛이 갔다.



 날이 한 없이 무덥다가 두어번 태풍이 오더니 금새 서늘해져 버렸다. 

  가을이다. 내가 기대한 가을은 훨씬 기분 좋게 시원했었는데, 피부에 맞닿은 가을은 생각보다 스산하고 밍밍하다. 어물쩡 넘어간 여름이 체하기라도 한 듯 뒤 끝을 남긴 걸까. 어서 가을이 오라고 보채던 나는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에어컨을 틀기에는 너무 서늘하고 선풍기 없이 잠들기엔 조금 답답한 날씨 때문에, 밤 새 선풍기를 틀어 놓았다가 새벽에 얕은 기침을 하며 잠에서 깨곤 한다. 기침을 할 때마다 좋지 않은 기관지의 잔여물들이 딸려 올라와서, 요즘 자기 전에 머리맡에는 항상 두루마기 휴지를 올려놓는다. 


  한 보름정도를 잔병으로 몸을 앓은 탓에 일을 하는 생활의 밸런스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프리랜서로 2년여를 생활하며 내 나름의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가끔 이렇게 아프거나 해서 일주일 이상 스케줄의 변동이 생기면 여지없이 생활이 무너져 버린다. 아니, 사실 생활이 무너지기보다 의지가 무너지는 편이 맞다. 아프기 전의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사람처럼 가까운 사람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살짝 맛이 간다. 여기서 살짝 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처럼 의식 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를 두며 맛이 가기 때문이다.



 주 5일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의 월요병처럼 일이 닥치는 파도가 두렵고 귀찮아져 버렸다. 문제는 그게 월요일에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일주일에 월요일만 있는 듯이 무기력과 예민함에 쪄들었다. 빨라야 할 때 빠르지 못하고, 둔해야 할 때 둔하지 못해서 온도차가 맞지 않는 리액션이 주위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일을 할 때에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마지못해 끌려간다. 딱히 쉬는 것도 아니면서 보람되지 않아서 답답하고, 빡빡한 일정도 아닌데 기분에 치여서 헉헉대는 꼬락서니가 영 볼품이 없다.



 이쯤되니 내 상황의 모든 것이 망망대해에 뜬 부표 같이 표류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방향도 없고 동력도 없다. 수영장의 빨갛고 노란 줄줄이 소세지 같은 레인이라면 차라리 중간중간 마디라도 있지.. 바다 위 부표는 정말 대책없다. 대책없이 움직이는 궤적이 나를 따라 아무 의미없이 그려지고 있다. 촬영을 가고, 벌려 놓은 일은 수습하고, 부탁받은 일은 우물거리며 처리하고.. 그렇게 의미 없다 생각하는 동선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질질 끌려가던 어느 날. 대학로에 촬영 미팅을 가게 되었다. 연극 공연 프로그램 촬영 건으로 연습하는 것을 실제로 보며 분위기를 볼 요량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연극하는 사람들의 연습장면을 보게 되었다. 드글거리는 열정이 사람들 머리 위에 아지랑이 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학 시절 무섭게 빠져들었던 연극과 무대에 대한 동경이 저 어딘가에서 그들과 함께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빠져들때 함께 빠져들었으며, 소리치고 뒹굴고-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서 휘몰아치는 그들의 공기가 살 끝에 베여 저절로 입에 마른 침이 고였다. 



 그때였다. 내 속에 무언가가 펄쩍 튀어 올랐다. 그것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머리 깊숙이 어떤 핵을 치고 지나자, 찌르르- 정신이 버쩍든다. 표류하던 부표에서 시선이 빠져나와 헬기에 카메라를 달고 이동하는 듯이 시야가 부왁-하고 넓어지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멀리서 바라본 정경에 내 부표는 목표를 향해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다만 지금 지나는 구간이 넓고 넓어서, 하루에 개미만큼 움직이는 부표가 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마저 잠시 까먹었을 뿐. 



다시 가을이 왔다. 가을에는 항상 무언가 잃어버리고, 헤메고 만다. 


예전에 잠깐 밴드를 하고 싶다며 끄적이던 노래 중에 '가을을 헤메다' 라는 노래도 만들었던가.. 


이번 가을에도 한참 헤메려나 싶었는데 적당히 길을 잃고 휘청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게 나이 한 살 위에 포상처럼 날아드는 '여유'라고 짐작한다. 앞으로 가는 건지, 옆으로 살짝 우회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가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베시시 웃을 수 있는 여유. 잘 가고 있다는 확신도 없지만 부표에서 '멍' 때릴 수 있는 여유. 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러다 연극 연습을 보고 느낀 것처럼 또 다른 자극을 받고 제트스키처럼 날라갈 동력을 얻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 것도 못한 채 나이만 두어개 더 먹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뭐 또 어떤가. 월요병이 계속 되는 느낌이야 기분탓이지, 사실 일주일은 돌고 도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괜찮아. 살짝 맛이 가도. 가을은 여전하니까. 곧 약속처럼 추워질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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