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머물던 어느 날이었다.
지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시간 되면 같이 저녁 먹을래?”
아무도 없는 제주에 일하러 홀로 내려와 우연한 약속이 생기는 날이면, 일상의 작은 이벤트 같이 느껴져서 보통은 즐겁게 나가곤 했지만, 그날은 유독 망설여졌다.
특별히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조금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를 거절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 다음에 또 마주칠 상황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이어서 마음 한편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을 잠시 미뤄둔 채 “좋아요, 몇 시에 볼까요?” 그렇게 답장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내기 직전 문득 손이 멈췄다. '오름에 가고 싶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다른 생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기보다 바람이 부는 길을 고요히 걷고 싶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에 시간 되실 때 만나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괜히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나는 차를 몰고 곧장 오름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돌길을 밟는 발소리, 풀잎이 스치는 소리, 멀리 보이는 빼곡한 나무들이 이어낸 길,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 걸음을 옮길수록 몸은 조금씩 느려지고 시야가 넓게 펼쳐졌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나의 불편함을 미뤄두는 선택을 꽤 자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 어색한 대화, 내가 조금 더 맞추어야 하는 관계. 그런 순간마다 나는 마음보다 상황을 먼저 택했다.
하지만 번아웃을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타인을 배려하듯 나 자신을 먼저 배려해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크기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작은 가방과 큰 가방의 용도가 다르듯 내가 담을 수 있는 것이 조금 적다 싶으면 꼭 필요한 것만 두고, 넉넉히 담아낼 수 있을 때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까지 기쁘게 넣어두고 꺼내어 줄 수 있단 사실을.
오름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었다.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작게 이어져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삶에서도 이런 순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불편함을 미루는 선택 대신 나를 향한 선택을 해보는 순간. 오름을 내려오는 길에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누군가와의 약속을 하나 미뤘을 뿐이지만 그 대신 나의 마음 하나를, 지금 꼭 지니고 싶은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더 자주 나에게 묻는다. 지금 이 선택은 불편함을 미루는 선택일까, 아니면 기꺼이 선택하고 싶은 마음일까. 모든 길을 다 가보려 애쓰기보다 내가 오래 걸을 수 있는 길을 남겨두며 가능하다면 조금 더 천천히 나를 먼저 선택하는 쪽으로 걸어간다.
불편함을 지닌 채 그 길로 걷는 일은, 어쩌면 울퉁불퉁한 길을 골라 걷는 것일지도 모른다.
험한 길을 지나야 할 때도 있지만 일부러 바다를 보며 걸어가는 길, 숲 속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며 내가 마주하고 싶은 것들을 바라보고 만지며 걸어가다 보면 자주 만난 길이 먼저 말을 걸 때가 있다.
나는 좋아하고 바라는 길 가까이를 걷다 보면 삶이 그 방향으로 향한다고 믿는다. 내가 부러웠던 것들이, 나를 흔들었던 것들이 그날의 허망함을 지나가면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굳이 붙잡지 않는 것도 나를 지키는 길이 되니까.
삶의 슬픔과 고통을 완전히 피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는 일, 혹은 나의 불편함이 예견되는 일들에서 조금 물러설 수는 있다.
걸으며 멀리 바라보고 나아가듯 다른 길을 걸을지 판단해 보는 일처럼 조금 멀리 떨어져 삶을 바라보며
마음에 빛이 퍼지는 선택을 해보는 것.
나는 한낮의 오후를 하염없이 걸으며 그 시간 속에서 나를 웃게 하는 걸음을 삶으로 데려온다.
내 마음이 언제 포근해지는지 아는 일은, 내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언제인지를 알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