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말이 많았던 자리였다. 책 이야기를 나누자고 모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의 외로움, 상처, 지난 시간의 고단함.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이 조금씩 굳어가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진심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한 사람의 감정을 모두 받아내야 하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마냥 편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생각에 잠긴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을 토해낼 만큼 힘든 상황이었을 수도 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불편했을까.’ ‘나는 왜 그런 순간을 흘려보내지 못할 만큼 예민할까.’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조금 더 넓어지면 되지 않을까, 조금 더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늘 그랬듯 나를 먼저 조정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타인의 불편함을 나의 결함으로 바꾸고 있지?'라는 물음이 밀려왔다. 그제야 내가 지쳤던 이유는 그 사람이 아니라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추려던 그 마음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어왔고, 한 번 더 이해하려는 태도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오히려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걷는 동안 질문이 하나씩 또렷해졌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어야 할까. 나는 어디까지 나를 내어주고 있는 걸까. 집으로 향하는 길은 늘 같았지만, 그날의 길은 조금 달랐다. 걷는 동안 나는 관계의 장면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질문은 비단 관계에서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나는 비슷한 불안을 여러 번 마주했다.
이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맞을까. 나는 지금 버티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선택하고 있는 걸까. 불안으로 인한 번아웃은 몸보다 마음을 먼저 지치게 했다. 일은 해내고 있었지만, 이 방향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만두는 것도 두려웠고, 남아 있는 것도 두려웠다.
그때도 나는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지금 멈추면 후회할 거라고.
하지만 삼십 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지.'
관계 속에서 느낀 불편함도, 미래를 떠올릴 때의 초조함도 결국은 이 질문으로 모이고 있었다.
독서 모임에서 느낀 불편함과 어색함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자리가 분명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서로의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을 원했고, 한 사람의 감정이 자리를 잠식하는 분위기에서는 조금 물러서고 싶었다. 그건 차가워진 게 아니라 내 기준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직장을 두고 망설이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연봉, 공간의 결, 미래의 가능성. 나는 숫자나 환경보다 ‘이 선택을 지속하고도 나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불안은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이야말로 내가 아무 방향이나 택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는 걸. 불안은 나를 멈추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나에게 묻는 감정이었다. '이 관계 안에서 나는 나로 서 있는가. 이 선택 안에서 나는 나를 잃지 않는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질문을 피하지는 않았으니까.
예전에는 불안을 빨리 없애고 싶었다. 확신 없는 나를 부족하다고 여겼고, 망설이는 나를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불안은 약함이 아니라 나의 통로라는 걸. 그 감정을 통과하며 나는 조금씩 나의 기준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이해하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선택을, 모두에게 편안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자리를. 그래서 나는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 채로도 한 발을 내딛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삼십 분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걷는 동안 나는 알게 되었다. 불안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에게로 데려오기 위해 찾아온다는 걸.
불안이 밀려올 때, 나는 나의 불안 속에서 나의 기준을 바라본다. 지반을 흔드는 불안은 우리를 무너뜨리게 하지만 굳건하게 발을 내딛는 동안 흔들리는 바람으로는 그 나아감을 막을 수 없다.
나만의 통로를 이어나가며 불안 속에서도 걸어 나가는 것. 그것이 나만의 걸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