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by 설안


제주에 내려왔을 때,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일이 싫었던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에 내려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조금씩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끝나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했다. 집에 있기에는 마음이 답답했고, 어디가 멀리 떠날 만큼의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서울둘레길을 걸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어떤 날은 산책길을 가장한 등산이었고, 무리한 마음에 버거워 산 중턱에서 울어버리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큰 나무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아름다워 걷는 길마다 그 길을 지나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라보는 풍경마다 행복해지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빛과 바람이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일으키는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배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고 고비를 건너는 나를 다독이는 손길로, 빛이 내려앉은 표정으로 삶을 데려가야 한다는 것, 내가 지나온 장면들의 힘듦과 아름다움이 무의식에 새겨져 삶도 그러하다는 것을 길이 수없이 내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매일 밖으로 나와 집 앞 바닷가를, 오름을, 올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을 맞으며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길은 원래 여기 있었구나.'

내가 힘들어하기 전에도, 내가 바쁘게 살던 시간에도. 살아가고 행복해지고 위로받고 삶을 끌어안을 자리를 마련하라고 언제나 곁에 놓여 있었다.


사람은 종종 어딘가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곳, 더 나은 삶, 더 멀리 있는 미래를 향해서. 그래서 우리는 늘 서두르며 살아간다.


하지만 걷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어디로 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멈춘 사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내 삶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멈춘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 된다.


걷는다는 건 거창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한 발을 조금 앞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삶을 걷는다.

내딛는 만큼 넓어지는 나를, 보이지 않던 바다가 조금 내딛으면 훤히 보인다는 것을, 풍덩 빠져도 좋다고 안아주는 품을 갖기 위해서.


바다와 숲과 길은 내게 말해주었다.

“네게 놓여 있는 것들을 바라봐.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충분한 그늘이 너에게 있어. 그리고 다시 걸어가면 돼. 네가 너를 품으면 돼.”


언제나 길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내게 머물면서, 나아갈 길을 안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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