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청춘입니다
저의 웹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한 목적보다는, 저의 학부시절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지기 전에 한번 되돌아보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정말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4년이라는 학부생활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감정을 느끼고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진로에 대해 고민했던 순간들을 시간순으로 모아보았습니다.
고등학생 때의 꿈은 발명가였습니다. 발명가라는 막연한 꿈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공학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 참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발명가는 어릴 때부터 마음 깊이 간직해온 꿈이었습니다. 그림일기에 하늘과 땅, 바다에서 모두 다닐 수 있는 “해지천”이라는 것을 그렸던 기억의 단편이 있고, 발명 노트를 만들어 아이디어를 적고 재활용품을 모아 잡동사니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으며, 발명대회를 빼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뭔가 만들 때는 물리적인 지식이 가장 바탕이 되고, 기계공학과가 뭔가 만드는 경험을 가장 많이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기계공학과에 진학하고자 했습니다. 맞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꿈이나 학과에 대해선 깊이 생각을 안 하고 어느 대학을 가게 될 지만 생각하며 공부했습니다. 그냥 좋은 학교 가서 내가 나중에 뭘 하고 싶든지 지장이 없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앞에 놓인 공부를 하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시간은 어느새 3년이 흘러 입시철이 되었습니다. 조기졸업에는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3학년 때 서울대에 도전해볼 수 있었습니다. 기계공학과를 적기에는 한참 부족했고, 마침 지구과학 내신성적이 가장 좋아 지구환경과학부에 지원했습니다. 학과보다 학교가 더 중요했다고 생각했고, 대신 복수전공이 가능한 2학년 2학기 때부터 기계공학과를 복수 전공하기 시작했습니다.
3학년 1학기에는 현재 명예교수이신 김종원 교수님의 기계제품 설계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마지막 시간에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얘기라며 ‘꿈꾸는 공대생’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강의의 내용은 자기 꿈이 없는 공대생들의 실태, 대학 시절부터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야 할 필요성, 목표는 어떤 방식으로 세우고 구체화시켜야 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앞으로 제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을 바꿀 것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마침 3학년 1학기에는 기계공학과의 4대 역학을 마무리했고, 지구환경과학부에서도 대기, 해양, 지질 중 메인으로 공부했던 대기 분야의 본격적인 전공수업을 들었습니다. 즉, 대충 어느 분야가 더 마음에 들고 어떤 커리어를 쌓아갈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자연스럽게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모든 대면활동이 취소되어 집에만 있었기에, 3학년 1학기 여름방학에는 이전 방학 때와 같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밴드 공연을 준비하지 않고, 온전히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각종 연구실 홈페이지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고, 어떤 연구분야들이 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구환경과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대기과학 분야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전망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중요성은 더 강조될 것이 분명했고, 빅데이터나 딥러닝을 접목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지구환경과학부에서도 계산과학 연합전공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기역학 수업은 제가 그동안 들은 전공수업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였기에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계공학과에서 관심 있던 분야는 유체역학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4대 역학 중 유체역학이 가장 어려웠고 실제로 성적도 가장 낮았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배웠던 그동안의 물리와 전혀 다른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너무 새롭고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2학년 2학기에 쓴맛을 보고도 3학년 1학기 응용 유체역학을 수강했는데, 역시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만 당시 강의하셨던 최해천 교수님께서 연구하고 계셨던 생체모방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생체모방 분야의 경우 다양한 원리를 구현해서 쓸모 있는 물건을 실제로 만들고, 특허로 연결되는 일이 많았기에 발명가를 꿈꾸는 저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전공이 아닌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대에 오지 못했더라면 기계공학과와 함께, 산업디자인을 복수 전공할 계획이었기에 디자인 쪽도 한 번은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방학에 스누온으로 미대 정의철 교수님의 ‘디자인 과정과 방법’ 수업을 듣고 너무 재밌어서 직접 교수님께 연락드려 면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기계과 출신의 다양한 교수님, CEO, 선배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는 기계산업경영 수업을 듣고선 경영학을 부전공이라도 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딱히 한 가지 길을 정할 수 없었고, 결국은 고등학생 때처럼 내가 졸업할 때 즈음 뭘 하고 싶던지 지장이 없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앞에 놓인 공부를 했습니다. 이미 관심분야 랩실에서 인턴을 시작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저는 아직도 고민 중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3학년 2학기 겨울방학, 저는 우연히 현대자동차 그룹의 CES 2020 발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발표는 현대차가 그리는 미래 도시의 모습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최대한 줄여 녹지를 많이 만들었고, 녹지에는 자율주행 전기 트램 같은 것들이 다녔으며, 사람들은 특이하게 생긴 비행체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특이하게 생긴 비행체의 이름은 에어 택시라고도 불리는 UAM (urban air mobility, 도심 항공교통)이었습니다. 현대차는 미래 도시의 컨셉 중에서도 UAM을 강조했으며, S-A1이라는 컨셉 기체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본 형태의 교통수단이었지만, 이것을 본 순간 어릴 적 그림일기의 “해지천”이 머릿속에 갑자기 생각나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자동차에 날개를 달아서 하늘을 날 수 있게 만든 PAV에 대해서 본 적은 있지만 활주로가 필요하고 여러모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UAM은 활주로가 필요하지 않고 자동차와 아예 별개의 새로운 교통수단이었기에, 그런 한계를 넘어 이제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현대자동차와 같이 글로벌 대기업이 정말 진지하게 UAM 개발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뜬구름 잡는 얘기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고, UAM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미 UAM은 항공업계에서 피할 수 없는 와해적 기술로 미래 교통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는 합의가 있으며,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큰 이슈였고, 모건 스탠리 등 수많은 회사의 market study, NASA나 DLR (독일 항공우주국) 등의 기체 개발 관련 연구, 스타트업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속 간직했던 상상이 마침 대학을 졸업할 즈음이 되니 상용화를 위한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기쁘면서도 소름이 돋았고, 마치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상용화되기까지 시간이 한 10년은 남았으니, 대학원 졸업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해서 뭔가 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따라서, 기존에 관심 있던 분야들에 더해 졸업 후 하나의 추가적인 가능성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4학년이 되기 직전, 학과 홈페이지에서 전과 공지를 보았습니다. 그동안은 지구환경과학부에 충분히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에 전과는 하지 않았었는데, UAM에 대해 알게 된 뒤로는 아무래도 전과를 하는 게 대학원 갈 때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4학년에 전과를 하는 경우 졸업이 너무 늦어질 수가 있고, 이미 복수전공을 하며 지구환경과학부에서도 학점을 많이 들어 놓았기에 전과 후 다시 지구환경과학부를 복수 전공해서 졸업하자는 비상식적인 전략을 세웠습니다. 당연히 전례가 거의 없었을 터라, 양 측 행정실에 꼼꼼히 문의하여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고 지구환경과학부의 담당교수님께도 잘 말씀을 드려 다행히도 계획대로 전과 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4학년 여름방학은 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턴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학년 여름방학 때 가지고 있던 다양한 관심분야, 겨울방학 때 접한 UAM, 4학년 때 알게 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분야 등 다양한 후보군 중에서 세 연구실을 추려서 교수님들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한 분은 생체모방 소프트 로봇, 한 분은 드론 제어, 한 분은 UAM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정말 우연히도, UAM을 하시는 이관중 교수님만 저와 면담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큰 고민 없이 해당 연구실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턴 때는 회전익 블레이드 표면 위 난류에 의해 발생하는 소음을 계산하는 실험식 기반 코드를 만들었습니다. 기계과 공부만 해와서 항공 쪽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 한 달간 항공역학과 헬리콥터 공기역학을 공부한 다음 소음 모델 논문을 공부했습니다. 여태 공부한 적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새로운 내용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있었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할 때가 되면 매일 보람찼습니다. 한 번뿐인 인턴이었지만 다행히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좋은 인상을 남겼고, 저도 연구실이 마음에 들었기에 해당 연구실로 진학하였습니다.
저는 대학 생활 내내 진로 고민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을 때 불안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만나게 된 특이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이전 것들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3학년 여름방학, 열심히 진로 고민을 할 때 읽었던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와시다 고야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이 정말 많았고,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제가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가치관으로 생각하는 overflow theory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기계산업경영 수업을 들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강연인 신학철 LG화학 부회장님이 강연에서 소개해주신 내용인데, 사람들은 누구나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물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컵을 채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물컵의 크기가 작다고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컵이 작더라도 열심히 채워서 그것을 넘치게 합니다. 물컵이 넘치면 더 큰 물컵이 주어지고, 처음부터 다시 물을 채우게 되는 것이죠. 저 또한 제 짧은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 물컵을 넘치게 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생 때 조금 늦게 특목고 준비를 시작했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 최선을 다한 경험, 고등학교 3학년 때 성적을 급격히 올리고 전국대회에서 수상한 경험, 지구환경과학부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전과했던 경험, 인턴을 했던 경험들이 지나고 보니 그런 순간이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물컵은 단순히 이전 물컵에서 크기만 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의 물컵이었죠. 이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들이 주어졌으며, 기회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했더니 값진 경험을 하고 물을 더 많이 채울 수 있었습니다. 기계공학과로 전과하자마자 공우에 들어와서, 회장을 하게 된 것도 전과 전에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이었지만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절한 시기, 중요한 순간에 제 물컵을 넘치게 하는 성과를 보이고자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하나는 정점에서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컵이 흘러넘치면 새로운 물컵이 주어진다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보니 어떤 기회나 동기가 주어졌을 때 능동적으로 물컵을 갈아치울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지구환경과학부에서도 좋은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지만, UAM을 우연히 접하고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전과를 하는 용기를 냈던 것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석사 1학년으로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앞으로 제 인생에서 만날 셀 수 없는 물컵들이 기다려집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도 앞으로 만날 물컵들을 기대해보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