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13
K에게,
사람을 살리는 건 정의일까 공감일까.
정말 마지막에, 상처받은 마음에게 정의와 공감 중 한 가지만 허락된다면 그를 살릴 수 있는 건 둘 중 무엇일까.
무엇을 붙들어야 우리는 내일을 선택하게 될지 그게 갑자기 궁금해졌어.
난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
뉴스를 통해 지겹도록 전해 듣는 소식들 있잖아. 학교폭력부터 시작해서 기득권자의 비리와 뇌물, 약자에 대한 강자의 당연한 착취, 그리고 이유가 있든 없든 누군가를 해치는 일들.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돼. 새로운 법안을 아무리 많이 통과시켜도 불공평한 세상을 완전히 공평하게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해. 누군가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겠지. 처음에는 이 사실이 너무 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어. 세상은 좋은 것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통째로 초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세상이 불완전하고 불공평한 덕분에 예측 불가능한 일들도 가능한 거겠지. 기적 같은 거 말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별일 아닌 데 학창 시절에는 왜 그렇게 작은 일들에 내 목숨이 달린 것처럼 행동했는지 모르겠어. 한 번은 학교에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아서 그 소문 때문에 친한 친구와 멀어지게 된 적이 있었어. 내 잘못 하나 없이 억울한 상황에 놓인 나는 그런 소문을 만들어내거나 건너 듣고 믿은 사람들이 모두 원망스러웠어.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왜 결국 나만 피해를 입어야 하지? 그때 처음으로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선명하게 불공평했어. 약자가 3을 갖고 강자가 7을 갖는 상황이 아니라 약자는 -10, 강자는 10을 갖는 선명한 불공평. 그때 내가 원한 건 잘못한 사람들을 벌하고 피해자에게 진실된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 정의만이 아니었어.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믿어주는 것. 1분이라도 좋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작은 공감이 간절히 필요했어.
내가 나 스스로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어. 게으름, 소심함, 우울함, 질투, 피해의식 등 내가 싫어하는 성격과 특성들이 내 감정을 지배하고 하루 전체를 집어삼켜서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날이면 나는 내 자신이 죽도록 싫었어. 뒤쳐지고 있거나 쓸모 없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에 손톱 주변의 살을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었고 내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지 육성으로 욕을 하기도 했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볼펜으로 손등 이곳저곳을 온 힘을 실러서 찔렀어.
“정신과를 가봐” “그거 다 성격 문제야, 성격을 바꿔 봐“ ”누가 널 그렇게 힘들게 했어”라는 말은 상황을 해결하려는 ‘정의’에 관한 질문들이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어. 가해자 그러니깐 문제의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의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
나에게 공감이란 두 손을 붙잡고 그랬구나 그랬어, 고생했어, 네 잘못이 아니야 등을 반복하는 어쩌면 조금 클리셰적인 모습만은 아니야.
삶의 덧없음을 얘기하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열심히 살아보려는 모순을 비웃고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목표임을 잘 알면서도 마치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 같이 신나게 떠들고 또 기대하고
걷다가 뜬금없이 넘어진 얘기, 성공률 100%의 떡볶이 레시피, 새로 나온 넷플릭스 시리즈 등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두서없이 꺼내어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흘러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시간들도 나에겐 더없는 위로가 되는 유효한 공감이야. 혼자서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는 건 좋아하는 사람들과 심각한 질문에 가장 멍청한 오답을 남발하며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웃어넘겼던 시간들이야. 진지한 대화보다 어쩌면 더 깊고 따뜻한.
이 편지들을 마음에 담아두지만 않고 너에게 건네줄 용기가 있었다면 너를 구할 수 있었을까.
너에게 필요한 정의와 공감을 둘 다 쥐어주고 싶지만 정의는 시간이 걸리니깐 공감의 마음이 너에게 먼저 전달되도록 서둘러 뛰어갈게.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마음은 어떻게든 전해질 수 있어. 글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