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유 Oct 08. 2023

영어 그게 뭐 대순가?

편지 #12

K에게,


하늘은 뿌옇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야. 우리 집 앞에는 스타벅스와 로컬 커피숍이 있어. 평소 같았으면 집을 나서기 전에 스타벅스 앱으로 픽업 주문을 하고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준비돼 있는 음료를 들고서 맨날 앉는 바 자리에 자리를 잡고 글을 썼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관성에 따르고 싶지 않았어. 로컬 커피숍만이 풍기는 마을 같은 느낌이 그립기도 했고.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 대부분 오래된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 트렌디한 팝 음악을 틀지 않는 것이 제일 좋고, 떠들썩하지 않은 소소한 대화와 규칙적인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어. 잠시라도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쉬고 싶은데 영어는 이 순간에도 소음을 뚫고 내 귀에 박힌다. 토익 리스닝 테스트 같아. 슬슬 머리가 아파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를 동일하게 구사하는 이중언어자(bilingual)가 아닌 내가 미국에서 산다는 건 하루하루가 유리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야. 하고 싶은 말을 100% 표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은 당연하고 발음이 어려운 단어를 내뱉을 때 혀가 이상하게 굳어버리거나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을 때면 자존감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해. 순식간에 100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만약 내가 영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직종에 종사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것 같아. 불행히도 나는 기술적인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확실한 결과물로 실력을 입증하는 이과 계열이 아니라 오직 말빨로 승부하는 완전한 문과 직종이야. 그래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 99%는 영어가 모국어이고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야. 나는 출근을 하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새로 발의된 법안에 대해 분석하는 글을 써. 정말 다행인 건 말을 할 일은 많지 않는다는 거야.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오래전부터 안고 온 나의 가장 큰 자격지심이자 목표는 원어민과 동등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거였어. 내가 하는 일이 영어를 기반으로 하는 일이기에 커리어의 발전을 위해선 완벽한 영어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결론에 스스로 도달했기 때문이야. 그 목표에 달성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울감에 휩싸였고 영어가 중요하지 않은 직종으로의 커리어 전환을 고심했어. 그런데 이번 주를 지나면서 내 마음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어. 나는 평생 원어민과 똑같은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없을지 몰라.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걸 수도 있어. 스포츠로 치면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페널티를 안고 경기에 임하는 거니깐.


내가 깨달은 건 언어에 대한 나의 시각이 잘못됐다는 거야. 내가 원했던 건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 원어민과 똑같은 자연스러운 발음과 억양으로 얘기해서 “저 사람은 외국인 같지가 않네”라는 말을 듣는 거였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상대방이 나를 “그들 중 하나(one of them)“로 인식하는 게 더 중요했던 거야. 어리석었어. 텅 빈 말을 완벽한 영어로 구사하는 사람보다 중요한 얘기를 서툰 영어로 전하는 사람이 백배만배 나아.


언어는 생각을 전하는 수단이지 결과가 아니다.


언어는 자신감이라는 말. 정말 수도 없이 들어본 말이야. 글쎄. 물론 자신감도 중요하지. 근데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나면, 예를 들어 언어가 밥벌이가 되는 단계에서는 자신감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뭘 말하고 싶은 가야. 생각이 선명하지 않을 때는 단어뿐만 아니라 문단 자체도 선명함을 잃어.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하면 최대한 정확한 단어와 문장과 글의 구조를 사용해서 어떻게든 그 핵심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어져.


영어 그게 뭐 대순가?

영어는 산 꼭대기에 달린 반짝이는 트로피가 아니야. 영어는 그냥 너와 나의 소통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야. 심지어 유일한 도구도 아니야. 이 세상엔 7천 개 이상의 언어가 있대. 수화도 있고. 심지어 고대시대에는 벽화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어.


그러니 타지 생활 중에 크고 작은 이유로 언어장벽을 느낄 때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울 이유가 없는 거야. 자책하는 데 헛된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그 에너지로 내 생각을 바닥부터 쌓아 올리고 그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를 선택하는 연습을 하는 게 현명해.


현명한 길이지만 어려운 길이기도 해. 겉모습보다 내면의 철학을 다진다는 건.


요즘 돈가스가 너무 땡기는 거야. 사 먹으면 편하겠지만 근처에 돈가스를 파는 일식집이 없어서 내가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어. 마트에 가서 돼지고기와 빵가루를 샀어. 고기에 밑간을 하고 칼등으로 열심히 두드린 다음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 순으로 묻혀서 기름에 튀겼어. 맛있었어. 그런데 너무 질긴 부위를 샀는지 조금 퍽퍽했어. 다음에는 돈가스에 더 적합한 부위를 살 거야. 돈가스에서 제일 중요한 건 튀김옷이 아니라 고기인 것 같아. 언어가 그렇듯, 음식도 똑같이 내실이 중요해.

이전 11화 향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