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11
K에게,
이번 주는 추석이 있는 연휴야. 한국에 있었다면 회사도 안 가고 명절 음식도 먹고 잘하면 여행계획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서 나는 평소와 똑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어. 명절만 되면 내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나. 원래의 나는 전혀 외롭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추석, 설날만 되면 갑자기 공허함이 밀려와. 애써 눌러왔던 향수가 한 번에 터지는 것 같아.
한국에 있었을 땐 너무 매워서 먹지도 않았던 엽떡 먹방을 찾아보고,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월드컵 16강 진출 하이라이트를 다시 보면서 애국심에 도취되곤 해. 대한민국 만만세야. 웃기지? 한국에 살 때는 나라 욕을 그렇게나 했는데, 외국에 오면 또 “우리나라 최고!”를 외치며 우리와 다른 현지 문화(다른 게 당연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어)와 느려터진 행정을 욕하게 돼.
미국이든 어디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지독히 피곤한 일이야.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 현지인들의 눈치를 보며 가장 자연스러운 영어 발음과 표현을 구사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고민하고, 가끔 불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혹시 이것도 인종차별인가 의심하고, 이곳을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워. 자잘한 것도 많지.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 언제든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병원, 동전 노래방, 산책로를 환히 비추는 가로등, 한강, 야외에서 먹는 술, 골목 어디든 있는 치킨집. 당연했던 것들이 전부 그리워. 그래서 우리에겐 여행이 필요한가 봐. 당연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닫기 위해.
사실 추석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감사함으로 가득 차있었어. 물론 위에 열거한 이유들로 지쳐있었지만 그 모든 걸 덮는 감사함이 있었어.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도 많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가진 나름의 장점들도 있으니깐. 높은 하늘, 깨끗한 공기, 삶에 대한 여유로운 태도, 더 많은 직업적 기회.
우습게도 그 감사한 마음은 민족 대명절 추석이 껴있는 이번 주만큼은 코빼기도 안 보여.
집에 가고 싶다. 한국 가고 싶다. 이 두 문장이 온몸을 파고드는 힘이 너무 세. 이곳에서의 장점들이 전부 소음으로 느껴질 만큼. 그래서 다들 향수병 향수병 하는 거겠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거라면 ‘향수병’이라는 단어도 없었을 거야.
벌써 가을이야. 집 앞의 스타벅스에서 Pumpkin Spice 라떼가 절찬리에 팔리고 있어. 나도 오늘 한잔 사 먹어봤어. 예전엔 맛있었는데 벌써 할머니 입맛이 됐는지 이젠 너무 달아. 아 맞다. 그거 알아? 한국 스타벅스는 다양한 케익을 파는데 미국 스타벅스는 케익을 안 팔아. 아무튼 한국이 최고야.
아.
올리브영 구경하다가 투썸플레이스에서 아이스박스 케익을 먹고 밤늦게까지 산책하고 싶어. 소화시킬 겸 동전노래방에 들러서 빅마마의 체념까지 한 곡 뽑으면 완벽할 텐데.
한국에서의 삶이 당연하지 않듯, 여기서의 삶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제멋대로야. 그리움에 붕 떠버리는 두 발을 손으로 꽉 잡아서 어떻게든 땅에 붙여 놓을게. 이 가을을 견디면 겨울이 오겠지. 크리스마스 조명이 반짝반짝 빛날 때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괜찮아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