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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Sep 17. 2023

강물이 흐르듯 쓰고 싶다

편지 #10

K에게,


나는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있어. 이 책을 읽다 보면 물 흐르듯이 쓴 글이란 게 느껴져. 생각의 흐름대로 담담히 솔직하게 써내려 간 글. 덜어낸 것도 더한 것도 없이.


내 글쓰기 방식과는 정반대였어. 나는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유용하게 느낄만한 특별한 감상이 생각날 때까지 글을 쓰지 않아. 글의 말미에는 무언가 새로운 의미, 삶의 교훈 같은 것이 있어야 읽는 사람의 시간이 낭비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야. 글을 쓸 때 사적인 정보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해. 직업, 배경, 학력, 사는 곳 등등 사회적인 것은 전부 다. 부끄럽기도 하고 나와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여러 단계의 자기 검열을 거치다 보니 솔직한 글을 쓰기 어려웠어. 나의 생각을 분리하여 정리한 글은 많이 썼지만 내 일상생활의 소소한 에피소드와 닿아있는 글은 쓴 기억이 별로 없어. 그래서 나는 자신의 삶 전체를 책 소재로 사용하는 에세이 작가들이 신기하고 부러웠어. ‘00살에 00를 퇴사하고 00하기로 했다‘ ‘나는 00하는 000이다’ 같은 제목의 책들 있잖아. 물론 정답은 없겠지. 현실에 닿아있는 솔직한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내 글처럼 형이상학적인 감정과 생각들만 분리한 시와 에세이 그 사이 어딘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그런 글을 쓰지 않는 거랑 쓰지 못하는 것은 다르니깐. 아직 나는 내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부끄럽고 어색하지만 언젠간 그런 솔직한 일기 같은 글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어려워하는 성격이야. 처음 보는 사람이나 심지어는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사람에게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취미는 뭐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얘기하지 않아. 나는 평일 9 to 5는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지만 동시에 대학원을 다니며 기후변화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고, 그 외에 시간에는 글도 쓰고 노래도 만들면서 작가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삶을 꿈꾸고 있어. 나는 내가 어중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변호사로, 대학원생으로, 혹은 작가 지망생, 가수 지망생으로 나를 소개하기에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 같은 걸까.


그래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두렵고 싫었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가게 되면 그냥 “대학원 다니면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곤 했지. 억지로 자기소개를 한 날이면 어김없이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밀려왔어. 얼마 전에 아직 많이 친해지지 않은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누군가 내 앨범에 대한 얘기를 꺼내서 모두 알게 되었던 적이 있어. 그때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었고 눈물이 흐를 뻔한 걸 꾹 참아야 했어. 나는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친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투명한 사람이 되는 건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어. 진짜 얘길 숨기려고 모호한 말로 대충 둘러대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그런데 있잖아.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글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 있어서 내가 항상 생각이 많고 솔직하지 못했던 건 어쩌면 교만일 수 있겠구나. 모든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욕심. 나와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에겐 내 걱정과 고민이 배부른 소리로 들려서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짐작하는, 겸손과 배려를 가장한 일방적 연민. 나처럼 어중간한 존재는 무능한 거라고 생각하는 비뚤린 사고와 이로 인해 더욱 낮아지는 자존감. 마음을 열고 시간을 들여 친해져 봤자 언젠간 서서히 멀어질 것 같다는 불안. 그건 다 교만이었어. 나의 생각과 짐작에 기대어 모든 일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교만. 나는 이제부터 나 중심의 생각을 덜어내고 그 자리를 여백으로 비워둘 거야. 그리고 그 여백을 타인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다정함으로 조금씩 채워갈 거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키는 소설가가 되기 전까지 작은 재즈바를 운영했어. 그러다 어느 날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대. 나는 하루키처럼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지도 않고 소설을 써야겠다는 목표도 없지만 저 대목이 나를 위로했던 이유는 뭘까 생각해 봤어. A라는 삶에서 B라는 삶으로 건너가는 순간은 거창한 게 아니라 어느 날 숨 쉬듯 찾아온다는 것. 그 말이 쓰여있지는 않았지만 단어들 사이를 비집고 전해졌기 때문이었어.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어. 솔직하게 써 내려간 글에는 활자로 표현되지 않아도 공기처럼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어.


내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길이 서서히 넓어지고 그 자리에 강물이 흐르게 되면 나도 그런 글을 쓸 수 있게 될까.

강물이 흐르듯 쓰고 싶어. 차마 쓰지 못한 마음이 단어와 단어 사이 어딘가를 비집고 나와서 누군가의 마음에 다다르는 상상을 해.

특별하지 않은 일상도 기록하다 보면 나도 몰랐던 마음이 담기고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 운명처럼 전해질 거라고 믿어.


나는 네가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어.

너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더 없는 위로일 거야.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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