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한 분이 7월 1일 자로 자유를 갈망하며퇴직 하셨고 한 분은 더위로 다시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기 시작, 한 분은 새로 산 구두가 발을 격하게 물어 버스를 타고 계셔서 나의 퇴근길 벗들이 사라져 버린 요즘이다.
퇴근길.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양산을 썼음에도 내가 탕후르가 되는 기분이었다.마치 논에서 일할 때나 입는 뜨거운 전신 장화를 껴 입던 조임이 느껴졌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길을 호다닥 지나 드디어 들어선 산책로. 나는 큰 숨을 고르며 양산을 접고 조용히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코로 익숙한 꽃향기가 훅들어와마치 감전된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만난 개똥나무
"야 개똥!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이 길을 오간지가사년째인데 이렇게 크게 자라 꽃을 피운건 올해 처음 보았다. 할머니를 산에 따라갔을 때 나던 그 꽃향기 바로 그 꽃 개똥이.
"할머이 엄청 좋은 냄새가 나"
"니 코가 개콜새"
"할머이 칡꽃도 아니고 무슨 냄샌데 이렇게 좋을까?"
"함 맞춰보래이"
"내가 몰르니깐 할머이한테 묻지. 얼른 갈촤줘"
"히힛 갈구촤줄까? 이게 개똥낭구 냄새잖나"
"개똥나무? 그런 나무도 있어?"
"여 봐 보래이 이거 이패리를 이래 비비믄 똥내가 난다 해서 개똥낭구잖나"
"어 할머이 진짜 똥내 같은 게 나는 거 같애. 근데 야는 꽃은 이래 냄새가 좋은데 이파리는 왜 이래?"
"그래도 이게 아주 효자여. 이패리부터 줄기까정 다 약이여"
"근데 할머이는 우뜨케 그래 잘 알어? 내가 볼 땐 다 그냥 풀이고 나문데"
"자꾸 가매이 들이다보래이. 그러다 보믄 눈에 보이. 요 보래이 더덕 싹도 있잖나. 아깨부터 바람에 계속 더덕 냄시가 솔솔 나두만. 아이고야 키빼기가 이래 큰 거 보이 나이를 마이 묵읐겠는데"
할머니는 여러 갈래로 나무를 둘둘 감고 올라간 더덕줄기를 올려다보며 말씀하셨다.
"할머이 근데 왜 안 캐?"
"지금은 싹이 마이 커서 뿌랭지에 기운이 읍어. 낭중에 싹 지고 나믄 그때 와서 캐야지"
나는 개똥나무 꽃향기를 맡으며 할머니를 따라 산 구석구석을 누비며 으름도 따고, 벌레가 먹다 만 복숭아도 따고, 머루도 몇 송이 따서 씨를 뱉으며 걷는데 자꾸만 눈에 파고드는 작은 날벌레들과 아까부터 왕왕거리며 따라오는 똥파리 소리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계속해서 덤비는 날벌레들을 향해 커다란 칡잎을 든 손으로 휘이훠이 쫓다가 휙 던져버리고 머루를 한 입에 다 털어 넣었다. 그리고 산이 쩡쩡 울리도록손뼉을 치며 벌레를 쫓느라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울상으로 있는 나에게 앞서 가시던 할머니가 돌아다보며 말씀하셨다.
"니가 조용히 가매이 있음 안 달기 들어. 가매이 있으 봐"
"할머이 우뜨케 말한거여? 할머이 목소리가 꼭 산신령 같애. 근데 난 벌개이가 느므 싫어. 우리 이제 고만집에 가자"
" 이 마한 것. 집에 가자소리 안 한다 하고 따라와 놓고선 고새를 못 참고"
퇴근길 우연찮게 만난 누리장나무꽃나무.
이 길을 사 년이나 다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맡지 못한 꽃향기. 나는 이 상황이 반갑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매이 있음 보인다는 산신령 같던 할머니 목소리가 마치 귀에 들리는 것 만 같고, 그러게 나는 왜 매번 가매이 있지 못했을까?
너무 많은 것을 보려고,
너무 많은 것을 쥐려고,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저주하고 미워했던 나를 돌아본다.
해마다 그 자리에서 그 꽃향기로 그 잎으로 있었을 개똥나무를 보지 못한 것은 나였는데 갑자기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는 나의 질문에 개똥나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나도 어이가 없어 푸훗 웃음이 터졌다.
시에서 일부러 심은 것인지, 어쩌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알 순 없지만 나의 아침저녁을 함께 해주었던, 해주는 개똥나무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지겹디 지겹던(?) 일터로 가는 길에 행복의 이유가 한 개 더 생겼으니 내일 아침 기분은 조금 더 새롭게 다가올까?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 자리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고, 더 크게 꽃을 피워 더 멀리까지 향기를 보내줄 개똥나무를 기대하며,내년에도 후년에도 가매이 내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삶에서 향기는 아니더래도 정을 나누는 내가 되길 소망해 본다.
개똥나무 꽃향기를 맡으며 퇴근하는 고요한 나의 힐링 시간. 할머니 따라 꽃향기 따라 초록산을 누비던 소란스럽던 그 꼬맹이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2024년의 여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