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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Sep 06. 2024

야나할머니와 미액국

미역국이 주는 회복력

학교에 다녀오니 수돗가 다라에 시커먼 미역이 팅팅 불고 있었다.

나는 손에 만져지는 그 미끌거림이 좋아 미역을 주물럭주물럭 거리며 한참을 놀고 있었고,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에 맨 수건이 함빡 젖은 할머니가 비지땀을 흘리며 마당에 계셨다.


"할머이 오늘도 산에 간 여?"


"아니 오늘은 콩 밭에 풀 매고 왔지. 내 물 한 사발 다오"


나는 얼른 수돗물을 한 바가지 담아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이 그러다 쓰러지믄 우뜨칼라고 그래"


"우뜨카긴 우뜨케. 죽어삘믄 땅에 끌어 묻음 되지"


죽는다는 할머니의 대답에 나는 뾰족이 할 말이 없었다.


"니가 지녁 할라고 미액을 빨고 있나?"


"아니, 내가 저녁을 우뜨케 해. 그냥 미역이 있어서 만져봤지. 근데 누구 생일이야?"


"생일은 무슨. 미액국 끓이 물라 그라지. 그래 자꾸 치대믄 미액에 돌도 빠지고 물끄덩 대는 것도 삐끼지니 깨끄시 헹궈 논나"


할머니가 깊은숨을 몰아 쉬며 말씀하셨다.


"할머이 어디 아파?"


"아프긴. 더워 그라지"


나는 저러다 진짜 할머니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눈으론 할머니를 바라보며 미역을 계속 주물럭 거렸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감자가 들어간 미역국을 끓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고기나 황태나 굴이나 조갯살이나 뭔가 기운을 더 북돋아 줄 수 있는 재료를 넣어서 끓였으면 좋았겠지만 삼복더위 시골마을엔 특별한 재료가 없었다.


할머니는 다른 날 보다 더 더디게 식사를 하셨는데 밥 한 숟가락에 손수건으로 땀을 한 번 훔치시고, 국 한 숟가락에 땀을 또 한 번 훔치시고, 우리는 엄마가 해 놓은 오이냉국을 쉴 새 없이 퍼 먹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오이냉국엔 손도 대지 않고 묵묵히 미역국만 드시고 계셨다.


"할머이 왜 미역국하고 밥만 먹어?"


"기운나라고 그라지"


"미역국에 감자가 들어가서 느므 맛없어 보여"


"이잉 맛이 없긴. 이게 얼마나 보약인데"


할머니는 묵묵히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저녁밥을 드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할머니가 전에 캐다 말려 두신 산나물을 아직 해가 침범하지 못한 그늘 아래서 손질하고 계셨다.


"할머이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이야 잘 잤다. 이 잠꾸래기. 언제 일나나 했더니 인제 일났네"


"할머이 인제 안 아파?"


"그래 안 아프다."


"슬마 미역국을 먹어서 나은 건 아니지?"


"아니긴 왜 아니여. 니도 냉중에 더 크믄 미액국이 을매나 보약인지 알게 될거여. 미액국 먹을 때 찬바람 씨믄 안돼. 땀을 뻘뻘 흘리믄서 무야 싹 낫는기여"


그때까지도 나는 할머니 말이 뻥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시력까지 앗아간 당뇨, 외할머니의 극한 당뇨, 아버지의 당뇨와 뇌경색, 집안의 무수한 암환자들. 모든 사유를 종합해 볼 때 나에겐 건강관리가 아주 중요했지만 나에겐 절실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8월 초 나에겐 고혈압과 함께 과호흡에 따른 여러 가지 증상들이 쳐들어왔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극한 상황에 '아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공포를 절실하게 느꼈다.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밥을 씹어 넘기는 것도 힘들고, 물도 쓰고, 음료수도 쓰고, 모든 음식물을 목구멍에서 거부하는 느낌에다 온몸에 머금고 있던 나의 기운들을 누군가가 마구마구 훔쳐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미역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나를 안 이래 이번처럼 걱정된 적이 없었다는 남편의 근심스러운 표정에 따라온 질문.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눕고만 싶었다.


"엄마 제가 지난번 해 드렸던 카레 해 드릴까요?"


큰 아이가 물어왔고 내가 암만 입맛이 없어도 내가 하지 않은 밥이 젤 맛있다는 불변진리를 잊지 않았기에 흔쾌히 대답을 하고 살짝 머뭇거리다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 주문 요리도 되나? 미역국 끓여 줄 수 있어?"


"미역국이요? 한 번 끓여보조모"


나는 큰 아이에게 주방을 맡기고 남편과 저녁 산보를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에어컨 바람 속에 숨은 후끈한 바람이 나를 간지럽히는데 그 속에 진한 카레냄새와 반가운 미역국 냄새가 식욕을 자극해 갑자기 그간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느껴졌다. 매사에 꼼꼼한 아이는 가족들에게 밥의 양을 선택하라는 문을 받고 원하는 양만큼을 밥공기에 꾹꾹 눌러 담아 그릇에 거꾸로 덜어 담고, 위에 카레를 뿌리고 동그란 반숙 계란 프라이까지 얹어 식탁에 내었고, 김이 펄펄 나는 소고기미역국도 사발 퍼 주었다.


뜨거운 미역국 첫 술에 입안이 따뜻해지고, 식도가 따뜻해지고 위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미역국 두 술에 달아났던 입맛이 돌아오는 기분에다 과연 내 손 끝 발끝에 피가 돌고 있나? 의심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한 듯 미역국이 긴급 수혈되는 좋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밥을 먹는데 나도 모르게 땀이 뚝뚝 떨어졌다. 자꾸만 땀을 훔치는 나에게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춰야 하냐며 작은 아이가 질문을 해 왔고 나는


"내가 산후조리 때 땀을 이만큼만 흘렸어도 진짜 산후풍은 안 왔을 텐데"


라고 농담을 던지자 식구들이 밥을 먹다 엥?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첫 솜씨 미역국

미역국 한 사발에 카레도 한 사발 다 먹고 나니 뿌옇게 보이던 세상이 환하게 보이는 느낌이 늘었다.

그리고 그 여름날 묵묵히 미역국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셨던 할머니의 심정이 어땠는지도 어렴풋이 짐작이 되어 다음에는 나도 감자를 넣고 꼭 한번 다시 끓여 먹어 보리라 생각하며, 며칠 저녁을 아들이 끓여준 미역국으로 산후조리 하는 산모 마냥 아주 성실히 열심히 먹었다.


아직 썩 개운 친 않지만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온몸에 빠져나간 기운을 보충하고자 매미소리, 새소리, 물소리, 개 짖는 소리,  물고기 뻐끔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탄천으로 산보를 나가고 있다. 신기하기 그지없다. 미역국이 그냥 미역국이 아니라 할머니의 발음대로, 액을 없애주는 미액국이 맞나 보다.




덧붙임 : 아들의 미역국 뒤로 2번이나 미역국을 더 끓인 나에게 어제 퇴근한 남편이 말했다.


남편 : 오늘 점심 메뉴에 뭐 나왔는지 알아?


별바라기 : 뭐 나왔는데?


남편 : 아니 글쎄 영양사도 미역국을 주더라


별바라기 : 흐흐흐 퍽 곤란했겠군. 그럴 줄 알고 오늘 저녁 당신 국은 콩나물국이야


남편 : 눈물 나게 고맙네


별바라기 : 진짜 산후조리 때 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미역국을 먹네. 나 미역 정말 사랑하나봐. 당신을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데


남편 : 노노. 나는 됐고, 당신을 사랑해 미역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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