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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Dec 06. 2024

[연재]가을과 겨울사이

#1. 오미주 이야기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금요일이었던가? 사무실 벽에 걸린 벽시계가 혹시 멈춘 것은 아닌가 하고 자꾸만 쳐다보는 미주 진즉부터 거슬려하고 있던 고대리의 눈총을 느낀 미주는 컴퓨터 모니터 구석에 있는 시계를 간간이 보고 있었다.


"미주 씨 뭐 데이트라도 있나 봐. 자꾸 시계만 보네. 그렇게 시계만 본다고 시간이 빨리 가?"


오늘도 여지없이 고대리 놈이 끝내 한마디 던졌다.


"에이 고대리는 뭔 말을 해도 그렇게 해. 지나치게 미주 씨한테 관심 보이더라" 


미주가 아무 말 못 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것을 아셨는지 뒤에 앉으시는 과장님이 농담을 던지셨지만 결코 타이밍이 맞지 않는 도움이었다.


"아 요새 미주 씨가 업무에 집중도 못하고 맘이 콩밭에 가 있는 거 같아서요. 오늘 올린 산서만 해도 그래요. 한 번에 패스를 못했잖아요"


"아 고대리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옛날 생각해야지. 그 티 벗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아 과장님. 과장님이 미주 씨를 그렇게 자꾸 감싸시니까 발전이 없는 거 아닙니까? 입사 선배자 인생 선배로서 충고할 건 따끔하게 해야지요"


"고대리 남걱정 하지 말고 본인 걱정이나 해. 좀 전에 올렸던 성우건설 결산서에 콤마 말고 점찍었더라. 그건 어느 나라 화폐표기법이야?"


"에이 과장님 농담이시죠? 제가 엑셀 박사인데 그런 실수를 했으려고요"


"아니 이 사람이 진짜라니깐. 한 번 봐"


그제야 고대리 놈은 주둥이를 닫았고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슬쩍 봤지만 아직도 5시 20분 밖에 되지 않았다.




탕비실도 치우고 며칠 전 친구가 보내깜찍이 머그잔 목욕도 시켜주고 싶었지만 고대리 놈의 잔소리를 듣느니 늦게 퇴근하는 게 낫겠다 싶어 며칠 뒤 세무서에 들고 갈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과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미주 씨 퇴근 안 해? 뭘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어?"


고개를 어 그렇게 보고 싶었던 벽시계를 보니 6시 10분이 막 넘고 있었다.


"아 네 과장님 퇴근하시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그래 미주 씨도 잘 보내고. 이번주도 본가 가?"


"아 네"


"맨날 본가만 가고 집에만 있지 말고 사람을 만나 사람을. 오경 씨처럼 연차 쓰고 여행을 가던지. 왜 내가 전에 말했던 후배 아직도 생각 있으면 말하고"


미주는 빙긋 웃으며 가벼운 목례로 과장님을 배웅하며 고대리 자리를 쳐다봤는데 그럼 그렇지. 고대리 놈은 진즉에 사무실서 사라지고 없었다.




탕비실을 정리 후 머그잔도 시원하게 목욕시켜 건조대에 올려두고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니 고대리 놈 뒷자리에 유리창은 방충망까지 열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누가 누굴 나무라"


미주는 유리창을 닫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고 고대리 놈의 책상을 보니 이것이 과연 퇴근한 사람의 자리가 맞는지, 잠시 자릴 비운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무질서 그 자체인데 탁상 달력의 4월 15일에 유난히도 게 그려져 있는 빨간 하트를 보며 미주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컴퓨터를 끄고 서랍장을 잠그고 슬리퍼에서 구두로 갈아 신으려고 하는 순간 이런, 툭  하고 구두 발목 끈이 끊어졌다.


"어르신. 오늘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오늘 오매불망 기다리던 금요일인데, 그간 정말 감사했는데 버텨주시는 김에 한 시간만 더 참아 주시지"


미주는 슬리퍼를 신고 가야 하나 끈 끊어진 구두를 신고 가야 하나 망설이다 슬리퍼는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아 구두를 신고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동생 미리에게 전화가 왔다.


"응 나 막 나가려고. 넌 어디야?"


"나도 막 나왔어. 언니 오늘 선아 올라오는 거  잊지 않았지?"


"아 그게 오늘이었어?"


"아 그게 오늘이었어? 언니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선아는 지금 주님 영접에 들떠 피 같은 반차를 쓰고 올라오고 있는데. 좀 전에 통화했을 때 서탄 지난다 했으니 아마 우리랑 집에 비슷하게 도착할 거야. 지하철 역으로 올 거지? 그럼 주당역 2번 출구서 "


"그래 알았어. 그리로 갈게"


미주는 끊어진 구두를 살살 달래 가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끈 끊어진 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좀 양심 없어 보이긴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로 하고 줄을 섰는데 주변에 서 계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미주를 바라보는 것 같아 움찔하며 발을 끌고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생각보다 더디다는 것을. 이렇게 더딘 줄 알았다면 그냥 계단으로 내려갈 것을 하는 후회는 이미 늦었고 드디어 천천히 움직여 지하에 도착해 한 분 두 분 어르신들이 내리기 시작하셨다. 마지막으로 미주가 내리려고 발을 끌자 앞서 내리신 할머니가 힐끗 보시더니 남편인 듯한 할아버지에게 말씀하시는 게 들렸다.


"아이고야 아가씨가 생긴 건 멀쩡한 다리가 병신이네. 쯧쯧"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미주는 오늘 처음 마주친 할머니 말씀에 장애인이 되어버린 자신을 보며 심호흡을 하며 주문을 걸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할머니 말까지 귀 담아 듣지 말자. 나에게 상처 주는 놈은 고대리 놈 하나로도 충분해'


드디어 기다리던 지하철 괴물이 와서 미주를 꿀꺽 삼켰다. 괴물에게 잡혀 먹힌 사람이 하나 두울 세엣... 서른, 서른 하나. 어 이번에는 과식했나 다섯 명 토하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대학가를 지나니 주변이 한산해졌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빈자리에 앉게 되어 한숨 고르며 휴대폰을 열었다.


"오늘 진짜 토할 때까지 노는 거야. 나는 오늘을 위하여 자그마치 한 달간 금주를 했다고. 오늘은 무조건 4차까지고 젤 먼저 는 사람이 오늘 술값 다 기다"


선아가 정주서 출발하기 전에 보내 놓은 문자를 이제야 보았다.


'가시네 이것이 아주 나를  또 호구 삼기로 작정을 했네 어'


미주는 문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미리와 선아는 올해 갓 대학을 졸업한 월급쟁이자 사회 초년생들이다.

미리는 제복의 환상으로 육사생이 꿈이었지만 실기준비를 하다 무릎인대 파열로 포기하고 특수교육으로 목표를 바꿔 현재 중학교 특수학급 기간제 교사로 근무 중이고, 선아는 미리와 4년 내내 붙어 놀던 술친구이자 성별만 같지 여보 당신 하는 사인데 현재 정주 시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고 이 둘의 공통점은 주님(?)을 남자보다도 더 사랑하고 성스럽고 귀하게 모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오미주. 나이는 스물다섯. 고향 화주시 전문대학서 회계학을 전공 후 졸업과 함께 소주시로 올라와 개인 회계사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무실 직원은 강세무사님, 그의 배우자인 실장님, 외상 잘 줄 것 같이 맘씨 좋게 생긴 정 과장님, 칼출근에 칼퇴근을 외치시는 수인 대리님. 그리고 무슨 억하 정인지 눈만 뜨면 나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스물일곱의 고대리 놈, 그리고 4년제 회계학을 전공하고 입사한 나와 동갑내기 오경 씨가 동료들이고(고대리 놈은 고) 이제는 제법 일이 익숙해져서 크게 헤매지 않고 업무를 해 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지만 사은품처럼 누구에게나 온다는 직장 권태기가 온 것인가? 의심하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미리와 선아의 만남은 신입생 OT에서였는데 둘의 말로는 무슨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단숨에 서로가 어디선가 만난듯한 느낌이 들어 자연스레 붙어다니다 보니 단짝이 되었고, 동기들은 물론 교수님들 조차도 이 둘을 둘이 아닌 하나로 대하며 4년의 학교생활을 보냈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함께 귀가를 하다 보니 선아의 자취방은 물품보관소가 되어 필요한 짐들과 본가에서 보낸 택배나 챙기러 가는 곳으로 전락했고 난리난리 치는 주인집 할머니에게  달치 월세를 더 드리는 조건으로 방을 빼서 미리의 방으로 살림을 죄다 옮겨와 정말 아주 자연스러운 동거인이 되었다. 게다가 취미도 경제관념도 비슷해 목적이 생기면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해 비용을 모아 해외여행을 , 특별한 술을 마시러 다녔고 국내 여행은 물론 뭐든 하고 싶은 이 생길 때마다 2인 1조가 되어 추진력 있게 밀어붙이는 용기가 있었지만 그에 비해 미주는 집 회사만 괘종시계추 마냥 왔다 갔다 하는 존재에다 어쩌다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 가려고 기차를 탈 때도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노심초사하는 겁 많은 어른이었다. 그런 내성적인 미주를 스무 살 때부터 봐 온 미리와 선아는 둘이 뭔가 계획이 생기면 미주까지 포함시켜 일을 추진했는데 항상 일이 지나간 후에 되돌아보면 동생들의 술값과 밥값을 계산하고 흘린 가방을 찾으러 다니고 토해 놓은 토사물들을 치우는 역할이 미주의 몫이었으나 그것 조차도 싫지 않은 미주였다.




휴대폰을 잠깐 들여다보며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를 알리는 방송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구두가 발에서 미끄러지며 달아났다. 지하철 바닥에 갑자기 로켓처럼 쏘아진 구두 한 짝은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해 우르르 지하철 홍해가 생겼고 당황한 미주는 신발을 신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손으로 번쩍 집어 내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내림과 동시에 문이 닫히며 출발한 지하철 덕분에 미주는 오랜 시간 창피하지 않음이 큰 다행이라 여기며 또 엘리베이터를 또 탈까 살짝 고민하다 계단으로 오르기로 하고 엇박자로 노는 발과 신발을 살살 달래며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휴우 지상의 공기가 이렇게 좋은 것이었어? K2를 정복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미주는 드디어 목적지인 집이 멀지 않다는 것에 희망을 느끼며 신호등을 향해 걸었는데 진즉에 켜진 초록불에 사람들은 반쯤 횡단보도를 건넌 상황이었다. 다음 신호를 건널까? 지금 건널까? 고민하던 미주는 끈 떨어진 구두한 번 쳐다보다 횡단보도로 진입해 부지런히 걸었지만 맘과 다르게 더딘 발걸음에 신호는 금방 빨간불로 바뀌었다.


8차선 도로 가운데 갇힌 미리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걷다 말고 도로 한가운데 서 있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빨간불이지만 욕심을 내어 마저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신나게 출발을 시작한 자동차 운전자들이 놀라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생각지 못한 상황과 클락션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 미주는 순간 현기증이 났고 저 멀리서 제복을 입은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며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것이 보였지만 미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인도 위로 뛰어올랐다.


미주가 인도로 올라왔음에도 화가 난 운전자는 경적을 어찌나 길게 누르며 지나가는지 인도 위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 한 마디씩 했고 어떤 분들은 이 모든 상황이 미주 탓이라 힐끗거리며 쳐다보기에 멋쩍어하고 있을 즈음 가뜩이나 먹먹하고 쿵쾅거리는 귀에 쩌렁쩌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교통법규위반으로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복장을 보니 경찰은 아니고 의경이라 미주는 우선 사정을 해보기로 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구두끈이 끊어져서 분명히 파란불에 건넜거든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아 네. 저 아저씨 아니고 의무경찰입니다. 분명 빨간불에 건너셔서 사고 유발은 물론 도로 교통 흐름에 지장을 주셨습니다. 신분증 보여 주시죠"


미주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유진섭이라 명찰을 단 의경은 미주의 신분증을 요구했고  뒤로 선임으로 보이는 듯한 의경 두 명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 진짜라니깐요. 저 파란불에 진입했어요"


미주가 진섭의 손등을 잡자


"아 불필요한 신체접촉은 사양합니다. 신분증 주세요."


미주는 갑작스레 일어난 이 모든 상황에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 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나 모여들어 미주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언니 무슨 일이야?"


"미리야 그게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어서"


미주는 울음이 터졌고 미리는 의경을 노려보았다.


"소주시 의경은 길에서 시민을 울려도 되나요? 어디 소속이에요? 딱지를 떼면 되지 사람은 왜 울려욧. 벌금이 얼만대요?"


미리의 앙칼진 목소리에 신분증을 내놓으라던 의경이 당황하는 눈치를 보이자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키가 큰 의경이 나서며 말했다.


"무리하게 횡단보도로 진입하셔서 저희가 안내 차원에서 그랬는데 놀라셨다면 양해 바랍니다. 그만 가시던 길 가셔도 좋습니다."


미주는 그치지 않는 울음을 훌쩍 거리며 끈 끊어진 구두를 발가락에 간신히 걸치고 뒤뚱거리며 걸었고, 화가 덜 풀린 미리는 미주의 어깨를 감싸고 걷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자매를 보고 있는 세명의 의경들을 다시 한번 번갈아가며 노려보았다.




"아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와. 기다리다 처녀귀신 되는 줄 알았잖아"


"우리가 늦은 게 아니고 네가 지나치게 밟고 온 거지 고속도로에 몇 방 거하게 찍히고 온  아니야?"


먼저 와서 기다리던 선아가 건넨 인사에 미리가 대답을 했지만 눈치 빠른 선아가 바로 낚아챘다.


"어 이거 뭐지 뭐지? 오늘 내가 날을 잘못 잡은 건가? 꽃다발 들고 골목 마중은 기대도 안 했지미리 북극마녀 같은 이 싸함 뭣이여? 그리고 언니 눈이랑 코는 왜 빨갛고 발은 또 그게 뭐야?"


"선아쓰 내가 아주 오미주 씨 때문에 미촤버리겄다. 너도 얼추 도착할 시간이고 오랜만에 주님 영접할 생각에 지하철 계단도 두 개씩 밟고 올라왔는데 입구가 시끌시끌한 거야. 그래서 뭔 일인가 하고 봤지. 그랬더니 언니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울고 있는 거야"


"뭐야 이런 십장생들을 봤나. 다 나오라고 해. 어떤 잡긋들이 우리 언니를 울린 거얏?"


선아가 윗도리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현관문을 튀어 나갈 자세를 취했다.


"워워 진정해 진정. 울린 건 새끼 짭새고 간략 요약하자면 끈 떨어진 구두를 신고 니가 횡단보도 건너다 빨간불이 된 거야. 그걸 나름 나랏밥 드시는 정의감 넘치는 새끼 짭새고 신분증 내놓으라니 언니가 놀라서 운 거지"


"우와 요새도 그렇게 열심인 의경어른이가 있어? 언니를 울린 건 괘씸하지만 녀석들 아주 칭찬해 줘야겠네. 근데 언니도 언니다. 슬리퍼를 하나 사서 신고 오던지, 그냥 확 딱지 떼고 오지 울긴 왜 울어?"


"아니 자꾸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하니 너무 겁나고 무서워서"


"그래 언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선아가 미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


"언니 근데 그거 기억해. 걔들 민증 까고 보면 우리 동생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어. 걔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제복 입혀 놓고 모자 씌워 놓으니깐 우리가 지레 겁먹는 거지. 걔들 구워삶기 나름이라니깐. 내가 지난번에 주 본정통서 주변에 아무도 없길래  가래침을 걸쭉하게 뱉었거든. 근데 그때가 뭐래더라 뭐 깨끗한 거리 환경 조성 어쩌고 하던 실시 주간이었는데 독수리 눈을 한 의경이 보고 달 같이 딱지를 떼러 좇아온 거야"


"그래서 딱지를 떼였어?"


"아이고 언니야. 저 가시네가 퍽도 그랬겠다. 딱 봐도 각 안 나와?"


소파에 만세를 하고 드러누워 있던 미리가 혀를 차며 웃었다.


"딱 봐도 애가 얼굴에 솜털이 송송난게 어려 보이더라고. 계급장을 보니 작대기도  개고. 그래서 말했지. 어우 죄송해요. 제가 임신 중인데 임신하면 입덧 때문에 침을 뱉어야 하거든요. 하면서 배를 내밀었어. 그랬더니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하고 가더라"


"히야 우리 선아 쓰 역쉬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그 타임에 어떻게 그 멘트를 치냐? 넌 복지사를 할게 아니라 사이비 교주나 드라마 작가가 딱이야" 


소파에 누워 있던 미리가 벌떡 일어나 물개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나는 그런 재치 있는 선아야 네가  부럽다."


"언니 아직 모르는구나. 언니도 재치와 위트는 넘쳐. 목소리랑 표정이 느므 참해서 그렇지. 그나저나 우리 오늘 기분도 그런데 집 근처서 먹지 말고 학교 근처로 갈까? 나간 김에 언니 구두도 하나 사자"


미주는 미리와 선아를 따라 형형색색 네온사인으로 꾸려진 먹자골목으로 나갔다.




"이모 선아 왔어요. 여기 김치등뼈찜 대자리랑 소맥이요"


"선아 오랜만 어서 와. 오가네 자매도 잘 지냈지?"


"네 이모님 안녕하셨어요? 장사는 잘 되시죠?"


"아니 세 자매가 자주 안 와서 매상이 안 올라. 문 닫게 생겼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이모가 고개를 내밀고 농담을 던졌다.


"자 이모 그간 부진했던 매상을 오늘 깡그리 올려드립니다. 저 작은 냉장고에 술은 저희 셋이 쏴악 비우고 갈 테니 걱정 마세요"


미리의 넉살에 미주가 피식 웃었다.


이모집이라 불리는 이 식당은 주메뉴가 김치등뼈찜이지만 이모의 그날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미역정식이 나오기도 하고 고등어가 구워지기도 하는 단순한 식당이 아닌 요술상자 같은 곳이었다.

미리와 선아의 모교인 H대 후문에서 200미터 떨어진, 도로에서 접근하기 좋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후미진 골목 끝자락에 있는 곳인데 미리의 첫 아르바이트이자 마지막 아르바이트 장소기도 했다. 첫 등록금이야 화주의 부모님께서 내주셨지만 용돈이라도 벌어서 써야겠다는 생각에 손님이 잘 갈 것 같지 않은 "이모집"을 골랐는데 그것은 미리의 착각이고 판단 실수였다. 사장인 이모님은 40대 중반의 개인사를 절대 드러내지 않는 비밀의 여인이었는데 정말 주변 대학의 모든 학생들의 이모였고, 직장인들의 누님이자 기도 했고, 아우님이기도 했다. 테이블도 6개밖에 없지만 늘 만석이어 뒷정리와 마감이 늦어지는 미리를 기다리다 선아까지 일을 거든 것이 계기가 되어 미리가 아프거나 본가에 가게 되는 날이면 선아가 아주 자연스럽게 대타를 뛰. 원체 걸걸한 성격에 술에 취한 성인 남자에게도 꿀리지 않은 깡을 가진 선아였기에 이모는 결국 선아와 미리를 동시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임명했고 그렇세 셋은 이모집의 가족이 되었다.


"미리 언니는 갈수록 고와지네. 남자친구 생겼구나?"


"아 그건 아니고. 이모님 감사합니다."


"아 감사할 것 없어요. 나 알잖아. 빈말 안 하는 거. 나 절대 매상 올리려고 하는 말 아니야"


"아 이모. 이모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 언니 진짠 줄 안단 말이에요. 이모 진실을 말해줘야 해요. 안 그럼 진짜 처녀귀신으늙어 죽는다니깐요"


국자로 국물을 뒤적거리던 미리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이모가 미리의 등짝을 때렸다.


"너는 남자 혼자만 꿰차지 말고 언니한테 소개도 하고 그래"


"이모 나도 없는 남자를 어떻게 언니한테 소개를 해요"


"왜 그 학교엔 총각선생도 없어?"


"에이 이모. 요즘 학교에 남자가 어딨어요. 죄다 여자들 뿐이지. 남자가 하나 있긴 하네. 교장슨상님과 정년퇴직 직전 행정실장님. 그리고 있어봤자 다 임자 있는 사람들이라 도 없어요"


"어이 주댁. 거긴 어때? 그 동네도 남자가 없어?"


"이모 남자가 왜 없어요. 음청 많죠. 하부지 원장님. 기계실 아자씨, 조경담당 아자씨, 사감아자씨, 운전기사 아자씨, 음 또 누가 있더라?"


선아가 밑반찬으로 나온 양배추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으며 손가락을 꼽아 보이자 이모가 선아의 등을 때릴 채비를 하며 다가오셨고 선아는 맞지 않으려고 등을 얼른 벽으로 붙였다.


"미리언니. 얘네랑 놀지 마. 그러다간 절대 연애 못해"


"아이 이모.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예요. 진실을 왜곡하심 안 되죠"


"미리. 으휴 말이나 못 하면. 자 다 끓었으니 실 때 먹어. 술은 알아서 꺼내 먹고"


이모는 또 들어닥친 손님들의 주문을 전해준 아르바이트 생의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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