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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가을과 겨울사이

#5. 닿을 듯 말 듯 한 인연

by 별바라기

기석은 외출을 하면 해야 할 일들에 맘이 급했다. 우선 형과 부모님께 전화도 드리고 서점서 토익 책과 존경하는 나태주 시인의 출간집도 챙기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전역을 앞두고 곧 민간인으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하기에 이리저리 맘이 초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외출서 낮에 마주친 미주를 또 보게 되다니. 지긋지긋한 소주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동안 행운이 있다면 오늘 몽땅 끌어다 쓰는 기분이었고, 설령 사실일지라도 억울할 것 같지 않았다. 기석은 불고기 버거가 무슨 맛인지 감자튀김이 뜨거운지 짠지, 케첩이 신지 단지도 느끼지 못하고 멍한 채로 버거를 먹었고 그 사이 미주와 미리가 쟁반을 정리하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후임병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미주에게 직접 미주의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자신의 이름과 본가의 연락처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갑자기 행동하기엔 미친놈 같았고, 무엇보다 미주의 동생 반응이 두렵기도 했다. 기석은 그렇게 미주를 떠나보내고 서점에 들러 책들을 사고 본가에 잠깐 안부 전화를 드렸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퇴근 전이시라는 아주머니의 답변을 듣고 다시 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형도 전화를 받지 않아 아쉬운 맘을 뒤로하고 경찰서로 복귀했다.




신나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온 미주와 미리. 미주는 특수학급 학생에게 뺨을 맞고 온 미리가 계속 신경이 쓰이고 미리의 휴대폰으로 아까부터 수십 통의 전화가 오고 있는데 누가 건 전화인지 몰라 받지 않고 있었다.


"미리야 내가 대신 받아 줄까?"


"아니야 언니. 분명 학생 엄마 거나 교감샘, 현희샘 셋 중 하나일 거야"


"만약 선아면 어떡하고?"


"으이그. 선아면 문자가 왔거나 언니한테 전화가 왔겠지"


"아 맞네"


"아 맞네? 언니는 가끔 상상외의 대답을 하더라. 어떻게 그 머리로 수석 졸업을 하고 그 어려운 회계업무를 뚝딱뚝딱하는지 정말 놀랄 노자야. 언니 혹시 우주에서 보낸 우주 스파인가?"


미리가 미주의 귀를 잡고 흔들며 웃었다.


"미리야 내일 출근할 수 있겠어?"


"언니 걱정하지 마. 당연히 출근해야지. 교사가 학교 안 가면 뭐 누가 놀아 주나?"


"뭐 언제는 교사도 학교 안 가고 싶다며?"


"이럴 줄 알고 다음 주 월급이 들어온대. 내 월급에 부끄럽진 않게 살아야지"


"그래. 우리 미리 장하다."


미주가 미리의 엉덩이를 툭 툭 툭 쳐주자 미리가 미주를 보며 말했다.


"언니 이럴 때 보면 꼭 엄마 판박이더라.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보고 싶네. 엄마한테 전화해 볼까?"


"아니야 하지 마. 지금 수요예배 가셨을 시간이잖아"


"아 오늘이 수요일이었구나? 아 아직도 목, 금, 토 삼일이나 학교를 더 가야 해? 언니 앞으로 토요일 학교 안 가고 한 수요일쯤 노는 그런 세상이 올까?"


"혹시 올지도 모르지. 수요일은 바라지도 않아. 토요일이라도 놀면 좋겠다. 근데 오늘 목에 거미줄도 걷었겠다 이왕 서비스하는 김에 주중 주님 영접은 금물이지만 딱 한 깡통만 할까?"


미주의 말에 미리의 눈이 커지며 미주를 쳐다보았다.


"오~ 오미주 오늘 여러 가지로 맘에 들어. 근데 인심 쓰는 김에 하나 말고 둘 어때?"


미리의 애교에 미주가 웃었고 둘은 맥주를 사서 시원하게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미주는 잠에서 깼다. 아직 인기척이 없는 걸로 봐서 미리는 자고 있는 듯했고 미주는 조용히 아침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미리가 좋아하는 뜨끈한 계란찜에 밥을 한 술 먹여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마 육수를 내고 계란을 풀어 계란찜을 하고 미리를 깨웠다.

"미리야 일어나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언니 나 무서운 꿈을 꿨어"


"왜? 꿈에서 괴물이라도 나왔어?"


"아니 나 꿈에서 교복 입고 지각하는 꿈 꿨다."


"얘 또 뭐래니? 잠 덜 깼네. 오미리 정신 차려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아 더 무서워. 엄마 잔소리 매일 같이 듣던 그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아. 설마 언니 아니고 엄마지?

엄마? 엄마?"


미리의 장난이 끝날 거 같지 않기에 미주는 아무 말 없이 미리의 방을 나와 차려 놓은 밥상을 치우려고 하자 미리가 뛰어나오며 미주를 말렸다.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먹는다고 먹어"


미주는 알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 학생에게 뺨을 맞은 미리의 마음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상처가 클지. 하지만 이 상황과 맘을 가뿐히 이겨냈으면 싶었다. 미주도 정말 있던 정마저 뚝뚝 떨어지게 출근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누군가 있기에 누구보다 그 맘을 절실히 알 것 같았다.




출근길 주당역 근처로 가니 어제와 똑같이 교통경찰과 의경들이 나와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앞을 지나가며 의경들을 살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지하철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의경들은 가슴에 죄다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키 큰 의경의 이름은 정작 한 번도 볼 생각을 못했다. 눈매가 유난히도 촉촉하고 깊었던 것 밖엔. 그리고 서점에서 봤을 때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손톱이 예뻤다.

"안녕하세요"

사무실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니 먼저 출근해 있던 오경 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미주 씨 어제 일은 잘 끝내고 왔어요?"


"네.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휴가 받은 기분이었어요. 대낮에 시내를 돌아다니려니깐 뭔가 일탈한 거 같이 낯설었고요"


"미주 씨 그거 알아요? 어제 고대리가 세무서에 전화해서 미주 씨 몇 시에 일 끝내고 갔냐고 묻고 중계한 거"


"고대리님이요?"


"근데 걱정 마요. 눈치 백 단 소중언니가 미주 씨 일이 늦어져서 엄청 늦게 갔다고 대답해 줬다고 문자 왔어요. 그러면서 고대리님이 미주 씨한테 호감 있는 거 아니냐고 궁금해했고"

"옛?"


미주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자가 멀리 굴러갔고 오경이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아니 미주 씨 그렇게까지 경기하면 내가 웃자고 말 못 하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 상상은 좀..."


"미주 씨. 내가 미주 씨 보다 월급 경력이 짧긴 하지만 이래저래 알바로 다져진 짬밥이 있어서 눈치는 있어요. 내가 봤을 때 고대리님이 도가 지나친 구석이 있지만 미주 씨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여기 오기 전 알바지에 매니저가 딱 고대리님 분신 같았거든요. 본디 똥개 근성 있는 사람은 꼭 자기 밑에 사람 하나 깔아 두려 해요. 미주 씨가 속이 좋아서 아무 소리 안 하니 더 기세등등해지는, 그러니 나보다 밥 더 먹고 똥 더 많이 싼, 가끔 똥이 지정 경로가 아닌 입에서도 나오는 사람이거니 생각해요. 아무 말 대잔치 할 때 입에서 똥 나오는 상상 해봐요. 그것도 재미있다니까요. 남의 상처 콤플렉스까지 다 받아주기엔 우리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그러니 미주 씨 스트레스받지 마요. 그러다 진짜 병난다니깐요"

그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고대리가 특유의 발소리로 씩씩대며 들어왔고 다급하게 자세를 잡는 두 사람을 보며 한 마디 던졌다.

"뭐야 두 사람 일찍 와서 혹시 내 욕하는 거에요?"


"아니 고대리님 출근하시자마자 무슨 그런 진담을 하세요. 진담은 진한 농담인 거 아시죠?"


오경 씨의 당당한 멘트에 미주는 다시 한번 감탄하며 놀라고 있었다.



"어이 나수경. 사무실로 걸려올 전화 있다고 대기하라고 전하래"


4소대의 표수경이 내무반에 고개만 밀어 넣은 채 큰소리로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졌다.


'뭐지? 이 시간에 사무실로 올 전화라면"


기석은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에는 오늘 소주시에서 일어난 온갖 사건사고들의 주인공들이 자리에 앉아 형사들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고 문가에 서서 두리번 거리는 기석을 보고 형사과장이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어 나수경 여기야"


기석은 형사과장 앞으로 걸어갔다.


"나수경. 아침부터 찾았는데 계속 외근 중이더만.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데 무전까진 필요 없다 하셔서 복귀하는 시간에 전한다고 했지"


"아 네 감사합니다."


기석은 형사과장이 친절하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구며 더군다나 많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 형사과장 자리로 전화를 건 배짱 좋은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는 사이 형사과장의 자리에 여러 대 있는 전화기 중 하얀색 전화기에 벨이 울리며 불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 편하게 받아"

형사과장은 자신을 아주 친절하게 소개하며 전화를 받더니 기석에게 후한 인심 쓰듯 전화기를 건네고 자리를 피해 줬고 기석은 사무실을 반쯤 등지고 형사과장 김문호 명패 앞에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통신보안. 수경 나기석. 전화받았습니다."


"기석아 나야"


"아니 영감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뭘 어떡하긴 어떡해. 아들 목소리 듣고 싶으면 전화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네 소식 듣고는 있었는데 어제 늦게 아주머니가 전화 왔었다고 전해줘서. 하필 어제는 엄마도 늦고 나도 늦어서"


"아니 그렇다고 많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 하얀 전화기로 전화를 주시면 아빠는 재밌겠지만 저는 너무 당황스럽지 말입니다. 저는 아빠만큼 강심장이 아니라고요. 티 나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티 좀 나면 어때? 이제 말년인데 좀 편하게 있다가 나와도 되잖아?"


"아 아빠. 그러면 여태껏 애쓴 보람이 없잖아요"


"아 아 알았어. 자식. 성질은 여전하네'


"아빠. 그런데 제가 보내드린 서동요 얘긴 잘 읽으셨어요?"


"음 그거 은밀하게 감사 중이다. 너무 나서지 말고 거기까지만 해"


기석이 형사과장 앞에서 하얀 전화기를 들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형사들이 힐끗거리기 시작하자 기석은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경례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복도에서 형사과장을 다시 만났다.

"어 나수경. 통화는 잘했고?"


"넵.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끝냈습니다."


"할머니는 괜찮으시대?"


"아 네.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그거 잘 됐네. 가봐. 수고해"


실실거리는 웃음으로 기석을 배웅하는, 갑자기 친절해진 형사과장의 미소가 기석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미리는 교문지도를 하고 있는 학생부장 앞을 어떤 표정과 어떤 발걸음으로 지나갈까? 고민을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 뭔 놈의 학교가 담도 높고 후문도 없고. 꼬져서'


하필이면 미리에게 주책맞게 관심을 보이는 학생부장이 학생들을 하나하나 아는 척하며 아침맞이를 하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려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안녕하십니까?"


미리가 여느 날과 똑같이 교문을 통과하려고 하자 학생부장이 득달같이 달려와 솥뚜껑 만한 두 손으로 미리의 볼을 잡고서 이리저리 흔들며 미리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호들갑을 떠는데 학생부장의 콧바람이 미리의 볼로 훅훅 불어왔고 무엇보다도 코 밖으로 한 뼘은 튀어나온 코털에 미리는 속이 울렁거렸다.

"오선생 괜찮아요? 우리가 어제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이 연약한 뺨을 어디 때릴 때가 있다고"


학생부장의 입에서 나는 담배냄새와 커피믹스냄새 그리고 아저씨 로션 냄새까지 더해져 미리의 속은 더 울렁거렸고 무엇보다 미리의 두 볼을 만지고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을 보고선 등교하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자 학생부장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리의 볼에 자유를 주었고 미리는 볼에 밴 학생부장의 손바닥 땀에 짜증이 올라와 씩씩거리며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 들어서니 먼저 출근한 희주샘과 익숙한 주원이의 뒷모습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 계셨고 미리를 본 희주샘이 인사를 하자 주원이 어머니가 벌떡 다가와 미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주원이를 용서해 주세요"

주원이는 눈만 껌뻑이며 미리를 보고 있고 주원이 아버지가 주원이의 고개를 밀며 잘못했다고 빌라고 주문하자 주원이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밤 새 연습했을 멘트를 읊어대며 세 가족이 연극을 시작했다. 미리는 그만하시라고 부모님을 말렸고 팔짱을 끼고 이 모든 상황을 관람하고 있는 주원이가 괘씸할 뿐이었다.


"이주원 너 선생님께 잘못했다고 말씀 안 드려"


날카로운 주원엄마의 목청에 주원이가 연습해 온 멘트를 또 읊어댔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약을 안 먹어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좀 전과 똑같은 대사를 외는 주원이에게 기가 막힌 미리였지만 뾰족한 수도 없었다.


특수반 담임인 현희샘의 안내로 부모님은 교실을 나가시고 아이들이 하나 둘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평상시 애교 많은 소희는 오자마자 선생님 안 아프냐고 눈물을 글썽여 미리를 뭉클하게 만들었고 그 광경을 여전히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주원이 괘씸하지만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란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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