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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와 버강지

세월이 흘러도 반복되는 ㅜㅜ

by 별바라기 Feb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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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래 머리 드밀고 있다간 홀랑 까술군다."


"할머이는 내가 뭐 바보래. 까실굴 때 까정 드밀고 있게"


"이잉 불은 살아 있어서 낼름 머리카랙을 잠 묵는대이"


"할머이 걱정 "


그리고 나는 버강지에 자꾸자꾸 마른 장작을 욱여넣었다.


"이 마한 것! 장작 고매 느래이. 방바닥에 불붙음 우쨀라고!"


나는 고구마를 구워 먹을 욕심에 붉은 장작을 많이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할머니에게 한소리 들었다.


"알겠어 장작을 좀 꺼낼게"


고개를 내밀고 손을 뻗어 버강지 깊은 곳에서 타고 있는 장작을 끄집어내던 그 순간 지지직하는 소리와 누린내가 진동을 했다.


"아이고 냄시야. 이 마한 것! 눈썹이랑 머리카래이 다 까술굿네. 그래 말을 안 듣더만 "


버강지서 갑자기 튀어나온 빨간 불은 나의 산발 곱슬머리를 날름 삼켜 버렸고 언젠가 버강지에 들어갔다 털을 홀라당 태워버린 누렁이 맨치  짧아져 볼품없게 되었다. 할머니는 손잡이에 광목천이 감긴 시커먼 가위로 그을린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셨고 버강지 안으로 던져진 머리카락 탄 냄새가 쇠죽 간에 진동을 했다.




앞으로 긴 연휴에 친정엘 먼저 들르기로 했다. 도착하니 독감을 앓고서도 자식들 주신다고 엄마는 두부 만드는 일을 강행하셨고, 나는 수돗가에 불린 콩을 기계에 넣고 갈고,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있었는데 성냥불을 켜는 일부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곁에서 던 작은 아이가 성냥불을 켜보겠며 거들었고, 나는 나의 모든 폐활량을 동원해 불씨를 살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너무 가까워. 그러다 불이 살아나면 어쩌려고?"


말하던 그 순간 지지직 소리와 함께 나의 앞머리는 노랗게 타들어가며 바스러졌다.


"엄마 어떡해 머리 탔어!"


작은 아이가 놀라 눈이 엄마소만큼 커졌는데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이 황당해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으이그 웃음이 나와? 큰일 날 뻔했잖아"


남편이 타버린 나의 머리를 만지며 물에 빠진 강아지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작은 아이는  역사적인 장면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사진을  나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대박!  40년 만에 머리를 다 까실구고. 다행히 안경 때문에 눈썹은 살았네"


"퍽도 다행이네"


남편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몽글몽글 두부몽글몽글 두부

내 머리카락의 어이없는 사고가 있긴 했지만 두부는 아주 맛있게 되었고, 엄마 등 너머로 배운 두부콩 가는 기계로 나는 외출 중이신 엄마를 대신해 이웃 아주머니네 두부콩도 갈아드렸는데 진짜 앗간 주인장 같이 팔뚝을 걷어 부친 내 모습이 폼 난다며 아줌마보다 아저씨가 더 좋아하시며 웃으셨다.




불조절을 잘못해 진짜 타버린 할머니방 장판이 떠오른다. 고구마를 굽겠다고 미련 맞게 넣었던 장작이 불러온 대참사. 할머니는 장판을 전체로 교체할 수 없어 조각조각 덮어 두셨는데 그래서 할머니방바닥은 미술시간에 만들던 모자이크 그림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버강지(아궁이) 안의 숯불을 보며 멍 때리고 있으니 머리카락 탄 시름도 잊은 채 그저 뜨끈하고 따뜻하고 정겹기만 하고, 그리고 엄마가 작은 아이가 입은 빵빵한 오리털 잠바를 걱정하며 알려 주신 것은 낙엽송은 다른 나무들 대비 불꽃이 많이 튀어 자칫하면 옷에 구멍 나기 십상이라 하셨는데 애석하게도 내 바지에 작은 구멍들이 난 것은 집에 돌아와 세탁을 하고서야 알았다.




두부콩을 가는 일

솔가지로 불을 붙이는 일

장작을 잔뜩 문 버강지를 지켜보는 일

두부를 만드는 일

뜨끈한 비지를 엄마소에게 주는 일

그리고 내 왼쪽 앞머리가 타고 바스러진 일까지 모두 오랜만에 해 보는 재밌는 들이었다. 마치 천방지축 뛰놀던 아홉 살 소녀로 돌아가 할머니 곁에서 불을 쬐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는데 그때는 할머니와 엄마를 근심시키더니 지금은 남편과 언니를 근심시키는 것은 여전한 천방지축이다.


이번 설은 정말 많이 웃고, 움직이고, 먹고, 등도 지지고 왔다.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눈으로 덮인 할머니 산소를 향해 인사하며 다음 친정행을 기약했다. 뭐 머리카락이야 길면 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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