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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와 똑딱똑딱 이야기

길고 커다란 마루 위 시계는~

by 별바라기 Mar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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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을 들여 뽑은 시계거금을 들여 뽑은 시계

길을 걷다 뽑기 기계가 대량으로 서 있는 상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우리 가족. 큰 아이가 쥐여준 오천 원으로 작은 아이가 뽑기 기계를 야심차게 돌렸는데 토끼 시계가 나왔다. 작은 아이는 캐릭터가 귀엽다고 환호를 하며 난리가 났고 나는 수능에도 못 쓰고 차고 다니지도 못하는 장난감 시계를 어디다 쓸 거냐며, 누구를 주면 좋을지 지인의 어린 자녀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스무 살 작은 아이의 분홍색 전자시계를 보며 떠오른 나의 첫 시계. 나의 첫 시계 네모난 작은 화면에 백설공주가 그려져 있고 까만 숫자가 깜빡이는 전자시계였다. 기억으론 10살 되던  겨울방학에 할머니가 삽주 뿌리 판 돈으로 삼천 원을 주고 사다 주신 선물이었는데 동네 친구들에게 가지끈 자랑질을 해대고 흥에 취해 여느 날 보다 더 열정적으로 눈사람을 열심히 만들고 돌아오니 전자시계 액정 안엔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할머이 이거 봐봐 시계에 물이 찼어"


"이런, 습이 찼잖나? 일로 내놔 보래이. 이게 말를라나?"


"할머이 안 말르믄 우짜지?"


"뭘 우째. 언젠가는 마르겄지. 그라니 물건을 아무 케나 막 쓰지 말고 니 성처럼 쫌 조신하게 애끼고 살으"


가뜩이나 시계도 고장나 속이 상한데 오늘도 한 소리 들은 나는 댓발 나온 입을 삐죽거리며 할머니 손바닥에 시계를 건넸다.




춘분을 코 앞에 두고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밤새 바깥 베란다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비가 오나 보다 잠을 설쳤는데 아침에 창밖을 보니 쌓인 습설도 습설이지만 만화 영화에 나올법한 눈보라까지 휘몰아치고 있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오늘도 걸어갈 거야?" 남편이 물었다.


"아니 오늘은 버스 탈래. 걸을 기운도 없어"


"잘 생각했어. 조심하고"


하지만 평상시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오던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버스정류장서 정수리와 어깨에 눈이 한 줌 쌓일 때쯤 버스가 한 대 도착했지만 이미 콩나물시루였다. 뻔뻔하게 간신히 올라타 앞문에 몸을 밀착시킨 채 숨죽여 양발에 있는대로 힘을 주고 서 있는데 라디오에서 익숙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시간을 알려 드립니다."




"야야 시계 맞추러들 온나"


"알았어 할머이"


"아홉 시를 알려드립니다. 뚜 뚜 뚜우"


내가 싱가지껀 태엽을 감아 놓은 할머니 방 괘종시계는 댕 댕 댕 소리를 내며 시계추가 왔다 갔다 춤을 추고, 언니는 할머니 손목 시곗바늘을 9시에 맞추자 작은 바늘이 조용히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앉은뱅이책상 위에 올려둔 빨간 탁상시계도 잘 돌아가니 당분간은 시계를 맞추는 대대적인 공조 작업은 없을 것이다.




콩나물시루, 유리창에 습기가 가득 차 있는 버스 안에서 눈꽃이 무섭게, 놀랍게, 예쁘게 핀 눈부신 가로수들을 보며 라디오가 알려주는 8시를 듣다 습기 찬 시계 때문에 울고불고했던 겨울날이 떠올랐다. 그때 사과 대신, 본인이 물 먹는 하마도 아닌 것이  흰 눈을 좍좍 빨아먹은 백설공주는 마르지 못하고 그대로 운명했고, 나는 뻔뻔하게 고장 난 시계를 차고 다녔다. 가끔 시계를 보는 척 폼도 잡으면서.


뽑기로 뽑은 시계를 만지작 거리며 작은 아이에게 어린 날의 얘기를 들려주니 한참 듣다 묻는다.


"엄마 이거라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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