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티를 지켜라
학교에 다녀오니 콩 타작할 때나 쓰는 커다란 갑바 위로 내 키만큼 큰 고추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흐헉, 할머이 이거 언제 다 딲을라고?"
"언제 다 딲긴. 딱다보믄 끝나겠지. 닌도 어여 행주 들고 앉아 거드래이"
"나 공회당서 애들이랑 놀기로 했는데"
"해질 때까정 한 방티 딱으믄 내 배곤 주지"
"진짜? 할머이 약속했다."
"오이야"
"근데 할머이 갑자기 꼬추를 왜 이렇게 마이 딲어?"
"마이 딲으야 방아 찌 추석 때 짐치도 하고, 느 고모하고 삼촌하고 오믄 싸줄라 그라지"
"파는 게 아니고 고모들이랑 작은 아빠들 줄라고? 그럼 먹을 사람한테 와서 딲으라고 해. 나 안 해"
"이 마한 것"
행주를 집어던지고 공회당으로 뛰는 내 뒤통수에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이랬다.
죽어라 뭔가를 해 놓으면 그것은 늘 고모들과 작은 아빠들의 몫이었다. 다른 집 동기간들은 휴가철이나 명절 연휴면 일찍 와 고추도 따고 소똥도 치고 그렇게 일도 돕고 가두만, 죄다 서울사람인 거 티 내듯 깨끗한 척 유난만 떨다가 할머니가 싸주는 산나물이며 담근 청들, 야채들, 된장, 고추장, 간장을 트렁크 한가득 싣고 일찌감치 달아났다. 물론 그들이 할머니 몸빼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는 파란 지폐를 보지 않았다면 더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가끔씩 엄마에게도 그 수혜가 있는 것 같아 두 주먹 불끈 쥐고 참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 이번엔 산처럼 쌓아 놓은 고추를 닦으라니! 백 원에 혹했던 나였지만 나는 힘껏 당긴 활시위에 걸친 화살처럼 할머니에게서 멀어져 갔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틀을 꼬박 마당에 장승처럼 자리를 지키고 앉아, 행주를 빨아가며 고추를 닦으셨다. 나는 할머니를 돕고 싶다가도 화가 나고, 미안하다가도 화가 나고, 그래서 마당에 있는 할머니를 못 본 척 쌩하니 지나쳤고 어제저녁 드디어 끝난 작업에 아빠는 고추 담은 가마니를 리어카에 실어 놓으셨다.
"야야 니 내하고 꼬칫방아찌러 안 갈래"
심하게 갈등이 되었다. 이번에도 할머니를 거절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결국 나는 리어카 운전대를 잡았다.
방앗간에 들어서니 이미 손님이 한가득이다.
이쪽 구석에서는 참기름을 짜려고 깨 볶는 연기가 폴폴 나고, 이쪽 구석에서는 고춧방아를 찧는 기계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우리 가마니 앞으로 줄 서 있는 고무 다라가 다섯 개도 넘어 보였다.
"허 씨 땍, 여 꼬칫방아 찔 긴데 씨 빼고 씨는 따로 챙겨 주소"
"할머이 다 몇 근이래요?"
"아 이비가 쟀을 땐 서른 근이라 하던데"
"아이고야 할머이 올해 고추 농사 잘 지싰네"
"농사를 아 이비하고 이미하고 짓지 뭐 내가 짓나"
"방아 찧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할머이 일 있음 댕기 오세요"
"그라지 않아도 내 철물점도 가고 고깃간도 가야 되니 해 노소"
기계소리가 왕왕 거리는 속에서 할머니와 방앗간집 아줌마는 익숙하게 대화를 나누시곤 할머니가 내 귀에다 조용히 말씀하셨다.
"니 요 가매이 앉아서 넘의 집 꺼랑 우리 방티 안 바꾸키나 잘 보고 있으래이"
나는 은밀한 지령을 받은 특수요원처럼 방앗간집 아줌마 눈치를 슬쩍 보고 할머니에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이취, 에이취"
아무리 재채기를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재채기가 났다.
"OO아 니 매운데 밖에라도 나갔다 와"
"괜찮아요"
허 씨 아줌마가 몇 번을 권했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는 나를 보고 윗동네 엄 씨 아줌마가 말씀하셨다.
"방티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할머이가 시케 놓고 가이 아가 나가지도 못하고 이래 앉아 있자네"
나는 할머니의 지령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근 거렸다.
수원에 갔다 반가운 방앗간 골목을 만났다. 참기름 짜는 냄새와 연기가 자욱했지만 안타깝게도 사진엔 담지 못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갔다가 고추 매운 내가 코를 톡 쏘는 바람에 대비할 새도 없이 우렁찬 재채기를 하자 지나가던 아줌마가 놀라 쳐다보시는 바람에 조금 창피했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건고추를 보니 어린 시절 할머니를 외면하던 나와 또 그 외면이 미안해 리어카를 끌고 편도 3km를 걸어 방앗간에 다녀오던 일들이 떠오른다. 또 방앗간을 보니 추석을 앞두고 할머니처럼 고추를 닦고 깨를 씻어 말리고 있을 친정엄마가 떠오르고, 얌체 같이 좋은 것만 쏙쏙 빼서 가지고 가던 고모들과 작은아버지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봤었던 어린 나도 보인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내가 또 그 고모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고, 얌체 같이 좋은 것만 쏙쏙 빼서 가지고 오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몰랐는데 왜 시간이 갈수록 친정서 뭔가를 얻어오면 이렇게 맘이 불편한 걸까? 특히나 남동생 내외가 하루 종일 부쳐 둔 전들과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서 올 때는 미안함을 넘어서 화가 난다. 우리 엄마는 왜 이렇게 손이 큰 걸까?(큰 손은 내가 또 닮았다는 ㅠㅠ)
고춧가루 한 줌, 참기를 한 병이 나의 손에 도착하기까지의 그 노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점점 더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이시지만 여전히 당신들이 젊었을 때 지원해 주시던 그 고집을 부리시고 계시기에 감사함을 넘어선 화남과 안타까움 또 죄스러운 마음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니들 클 때 못해준 거 손주들한테라도 해 주려고"
늘 미안타 하시는 부모님의 그 마음을 나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그리고 나는 내가 참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글을 쓰다 보니 사춘기 때 꽤나 삐딱하게 할머이 속을 긁었던 손녀였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착한 게 아니고 착한 척했던 소녀. 그게 바로 나였고 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