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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Feb 25. 2023

칸트는, 역시 졸린다

밑져야 본전?


문) 

당신은 왜?, 어떤 확신으로 하느님을 믿는가?     


순간 당황했던 A는, 그 질의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답) 

내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나는 ‘천국과 영생’ 얻는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잃을 것이 별로 없다. 어쨌거나 나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나름 착실하고 경건하게 살았을 테니... 그런데 내가 하느님을 믿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내게, 천국과 영생을 누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 편이 밑져야(?) 본전 이상으로 유익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A의 말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1623~1662)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 <팡세>를 통해 ‘파스칼의 내기 논증’에서 제시한 말이다.     


파스칼의 말에 의하면 만약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내기를 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데 걸라는 거다. 즉 신의 존재를 믿었는데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천국과 영생은 기본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일마다 성당(교회)에 가는 시간과 돈이라는 약간의 리스크가 생기긴 하지만. 그런데 신을 믿지 않았는데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영원한 지옥으로... 그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거다. 그러니 결론은 신을 믿으라는 거다.     


나는 가끔 철학책들을 뒤적인다. 최근에 윌 듀랜트의 <철학이야기>를 통해 위대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을 엿보고,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를 통해 철학·세기의 문학을 읽는다. 얼마 전에는 딸의 권유로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을 재밌게 읽었다.     


철학책은 장점이 두 가지다. 하나는 고대·중세·근대·현대 철학의 한 맥(존재론, 인식론 등)을 찾아 읽어 내는 지적호기심으로 날 새는 줄 모르거나, 잠이 안 올 때 논리학 같은 주제를 펼치면 효과 만점이다. 게다가 벽돌 두께 정도의 철학책이라면 '베개'로도 유용하다.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BC625?~BC546?)부터 현대에 (장 폴 사르트르 등) 이르기 까지, 그 수천 년 동안 철학은 왜 사그라지지 않고 존재할까? 본질은 뭘까? 혹자는 철학이 우리의 삶에 나침판이 되어, 모든 학문의 기초의 역할을 하며 우리를 현명하게 해 주고 삶을 경쟁력 있게 해 준다고 한다. 그런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철학의 진지한 효용성은 ‘의식의 명료화’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안다.     


살다가 문득 어떤 ‘생각과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삶이란?’ ‘신앙의 본질이란?’ ‘죽음에 대해서?’ 등등. 이런 어렴풋한 생각들에 대해 철학은 그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을 통해 답이 아니라 ‘길’을 제시한다. 철학은 내게 생각을 다듬고 사고법을 배우고 훈련하도록 해주며, 의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다양하게 해 준다. 나는 파스칼을 통해 신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들려다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파스칼은 신의 존재를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며, 신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해 준다)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부터 소크라테스 이전까지 철학가들은 ‘아르케’ 즉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생각과 의문’에 빠졌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명이 한창일 때, 비로소 ‘인간’의 본질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다. 중세 때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걸쳐 근대로 들어서면서 유럽대륙의 합리론(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과 영국의 경험론(로크-버클리-흄)으로 이어지고 , 이 둘은 칸트에 의해서 통합되고 헤겔로 이어진다. (철학사를 이렇게 간단히 약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1724~1804)를 만나면서 나는 잠이 많아졌다.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은 절대 순수하지 않다. 문체도 굉장히 난해하고 용어도 생소한데 내용자체는 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책에서 칸트도 파스칼과 비슷한 시각으로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비판’이란 ‘인간 이성의 능력에 한계를 긋겠다.’를 의미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런 문제들을 풀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험론에서 경험과 합리론에서 이성’을 받아들인 그는 이런 말은 남기기도 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역시 말이 어렵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리 스트로벨 교수(침례교 목사)의 <예수는 역사다. The Case for Chirst. 2017)>를 보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용(신앙경험) 없는 사고(이성)는 공허하고, 개념(이성) 없는 직관(신앙경험)은 맹목적이다]라고. 확실히 철학은 ‘의식을 명료화’ 지렛대로서 충실한 역할을 한다. <경험>과 <이성>이 없는 신앙은 간혹 공허하거나 맹목적일 수 있다. 아닌가? 


칸트는 역시 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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