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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pr 21. 2023

황리단 길, 단상

무심한 듯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른다

지난 시간을 가정(假定)한다는 것은 과거의 한 시점에서 지금의 결과로 이어진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경주로 이사 오지 않았으면, 지금의 직업 말고 다른 일을 했다면, 몇 해 전 마음먹은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등등.  살면서 상대로부터 듣기 거북한 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 내가 불편해하는 말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때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이다. 그때 그 주식을 샀으면 또는 그 채권은 팔지 않았다면, 그 땅이나 건물을 구입해 두었더라면 등등.     


몇 해 전 다니던 회사에서 시내 업무를 보러 갈 때면 일부러 꼭 지나던 길이 있었다. 도심인근이지만 주위 풍경은 낡은 중국집, 배달전문 다방, 허름한 세탁소 그리고 칙칙한 상가들... 마치 70년대를 연상시키는 영화 세트장 같은 곳이다. 경주 토박이들의 말로는 이곳이 옛날엔 방석집 골목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경주에는 방석 수요가 많았나? ㅎ)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내 시선을 끄는 것은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들이었다. 한그루가 아니라, 그 길 시작에서 부터 끝날 때까지 열 그루가 넘었다.     


대나무를 꽂은 집은 남의 길흉과 궁합과 재물 등을 미리 점쳐 준다는 점집이다. 그런데 용한 점쟁이가 없었는지 아니면, 자기 운세는 볼 능력이 되지 않았는지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다. 경주에 놀러 오는 많은 외지 젊은이들이 찾는,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 길을 벤치마킹한 황리단 길을 말하는 거다. 그 골목에서 점 봐주던 이들이 좀 예지력 있었다면 한몫 단단히 챙겼을 텐데.     


황리단 길이 자주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릴 즈음 지인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있었다. “일주일에도 여러 번 그 길을 다니면서 그곳이 홧(Hot)한 길이 될지 몰라단 말이야?”라는 쫑코. 자기들 같았으면 개발 초기에 여러 채를 싸게 사서 임대를 줬을 거란다. 쩝...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내 주 업무는 자금 담당이지 부동산 관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투기나 투자 혹은 어떤 사업이든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기에 황리단 길이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가는 것을 볼 때도, 나는 선을 긋고 지냈다.     


물론 내가 좀 더 영악해 그 길에 관심을 가지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적지 않은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지론이다. 인지적 부조화 이론과는 관계가 없으니 들먹이지 말자. 변방 늙은이의 말을 가리키는 새옹지마도 그렇다. 세상의 생사화복, 길흉화복 등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의도했던 일도 의도하지 않았던 일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우리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가정하지 말고 살 일이다. 그런 회상은 부지 없는,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는 푸념일 뿐이다. 과거가 어땠든 현실에 충실하면, 욕심내지 않고 순리대로 산다면, 미래는 크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곧 긴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다가온다. 그 일을 생각하면서 술 한 잔 마실 때 ‘맘 다짐'과 술 깨고 나서의 ‘맘가짐'이 자주 상충한다. 먼 훗날, 지금 곧 내릴 결정이, 가정법의 현재완료(과거 사실의 반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 또한 내 영역이 아니기에 소망만 할 뿐이지만.  


다 다음 달 초면 막내아들이 군에 입대한다. 그 자투리 시간 동안 황리단길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들을 늦은 시각에 데리러 갔다. 아들이 일을 마치는 동안 황리단 길 한편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 많은 젊은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듯이... 무심한 듯... 소리 없이 그렇게.     

<몇 해 전 황리단 길 모습이다. 대나무 꽂은 집이 저리도 많았는 데... 지금 돌이켜 보면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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