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증명서의 실체
가족관계증명서(상세)
등록기준지 강원도 행복 군 가왕면 하면리
본인 최영월 1939년 03월 01일 390301-*******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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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부 최태헌 사망
모 김해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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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박남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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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박일숙' 1964년 02월 20일 640220-******* 여
자녀 '박일섭' 1966년 08월 18일 660818-******* 남
자녀 '박이숙' 1969년 05월 01일 690501-******* 여
자녀 '박이섭' 1970년 02월 21일 700221-******* 남
자녀 '박삼숙' 1974년 07월 17일 740714-******* 여
* 사실이 아닌 소설 속 내용입니다.
할머니의 요양병원 생활이 시작된 지 어느덧 몇 주가 지나갔을까? 병원의 달력에는 지나간 날들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는 할머니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있는 그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깊은 자책감을 느꼈다. 그 자책감은 그저 할머니가 병원에 가기 전 찾아가지 않아서뿐만 아니라, 그전까지 얼마나 자주 할머니를 생각하며 연락을 취하였는지에 대한 부끄러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련이란 건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무언가로, 가슴 깊숙이 파묻힌 채로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할머니가 쓰러지셨을 때, 그 누구도 연락하지 않았던 것. 그것은 나에게 큰 미련으로 남아있었다. 그 순간, 나는 가족 중에서도 나 자신을 가장 탓했다. 나는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왜 할머니의 어려움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매주 요양병원 방문 때마다 할머니의 밝은 미소와 회복되는 기운을 보며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 각자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감정이 서로 다르게 흘러가 할머니의 상황 앞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슬픔, 불안, 희망,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을 쏟아 내고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요양 병원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은 따뜻했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감정의 파도는 차가웠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순간들이었다. 가족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지주 역할을 했는데, 이제 그 지주가 단 두 달 만에 무너지려고 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가족관계증명서의 실체
요양 병원 입원 초반 며칠 동안, 엄마와 막내이모 '박삼숙'은 큰 이모 '박일숙'과 할머니를 위해 꾸준히 면회를 신청했다. 병원에 들고 갈 수 있는 음료들과 반찬거리 그리고 꽃다발과 함께 면회실에 앉아, 그들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의 사랑과 헌신에 눈물이 날 뻔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2주가 지났는데도 할머니의 건강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 모두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웠다. 살아온 세월 동안 여러 번의 기복에 맞섰던 할머니였지만, 이번은 이전과는 달랐다. 혼자서는 식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고, 가장 기본적인 일상 활동도 도움 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막내이모 '박삼숙'의 말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하나둘씩 할머니의 증명서 실체들이 나오기 시작해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박삼숙' 그녀는 아주 냉정한 목소리로 "다들 마음 준비 단단히 해."라며 할머니의 어떤 일을 직감한 듯 말했고 그 말에 모두는 숨을 꼭 죽이며 있었다. 그리곤 이내 마치 '박삼숙'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이 큰 이모 '박일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속의 혼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병원의 복도에서 들려오는 다른 환자들의 대화 속에서도, 나는 할머니의 상황과 관련된 가족들의 대화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분명 의사 선생님은 할머니의 상태가 점차 개선될 것이라며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가족들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대화는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의 그런 반응은 어떤 의미로 내가 해석해야 할까? 사실, 나는 그들의 그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도 생명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물론, 병원의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 아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그저 일시적인 상황일 뿐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가족들의 대화에서는 그런 낙관적인 기대와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할머니가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것처럼 얘기하였다. 나는 그런 그들의 대화 속에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부정과 슬픔, 그리고 분노. 그런 감정들이 내 마음을 감싸며,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걸까? 그들은 할머니에게서 어떤 기대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이틀이 걸려 무한한 시간이 흐르는 듯했던 요양병원 그 안에서 큰 이모 '박일숙'의 표정은 처음 할머니를 지키겠다는 단호함에서 점점 지쳐가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시간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의지와 강인함을 깎아내렸다. 점차 그녀의 표정은 지치고 힘들어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초기의 강인한 의지와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박일숙'의 감정은 터져 나왔다.
그날의 저녁시간, 우리 집 식탁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을 깨뜨린 것은 엄마의 휴대전화 벨소리와 '박일숙'의 통화하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하듯 울려 퍼졌다. "너네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병원에 누구 아무나 있어 나 못 있어." 그녀의 말은 점점 더 높아져 가족들 모두가 그녀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엄마의 눈에는 걱정과 혼란이 가득했다. '박일숙' 이모의 그 절박한 목소리는 여전히 엄마의 귀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그녀의 감정은 너무나도 깊고 강렬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그녀의 목소리는 어제와 다르게 더욱 절절하게 울려왔다. "집 구해줘! 엄마 다 나은 것 같아. 엄마랑 같이 살게. 애들이랑 얘기해서 집 구해봐." 그 말에는 병원생활의 답답함과 그동안 겪었던 고독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그녀의 그런 변덕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했다.
가족들의 응원과 위로의 말도 큰 이모 '박일숙'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다음날이 되자, 큰 이모는 폭발했다. "나 엄마랑 못 살 거 같아! 알아서 해!"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적이었다. 가족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느꼈다. 할머니의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큰 이모는 요양병원 생활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이런 상황을 엄마는 해결하기 위해 '할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에 있는 자식들을 불러 의논을 준비하려 했다. 큰 이모의 상황은 급박했고, 가족들은 결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든 자식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큰삼촌 '박일섭'의 연락 두절은 가족 모임과 의논에 큰 결함을 가져왔다. 그의 부재는 가족들의 마음에 부담과 불안감을 주었다. 할머니와의 관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큰 아들로서 그의 의견과 결정이 필요했으나 그의 불참으로 인해 가족들은 고민의 굴레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그가 단순히 불참한 것이 아니라, 큰 아들의 위치에서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 때문에 일부러 연락을 회피하였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할머니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맡아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감과, 가족들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있었다. 이런 내면의 감정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결정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결국 큰삼촌은 끝까지 철저하게 무책임했고 일관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할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 지주 였던 '박일섭'으로 인해 할머니의 모든 가족들은 혼란과 고민을 겪게 되었고 '내 가족관계증명서'의 삶이 무너졌다.
'할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에 있는 두번째 지주 막내 삼촌 '박이섭'은 바쁜 일상으로 인해 병원에 자주 오지 못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의 업무 환경은 그를 바쁘게 만들어, 평일, 주말 없이 매일 낮과 밤이 뒤바뀐 삶 속에서 가족들과의 연락이나 만남이 쉽지 않았고 막내 이모 '박삼숙'은 의논을 위해 매일 만나 이야기를 했지만 특유의 성격으로 인해 다른 가족들과의 의견 차이를 뚜렷이 나타내곤 했다. 그녀의 감정이 격렬하게 표현되면서 가족 내에서의 토의가 어려워질 때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엄마는 어떻게 '할머니의가족관계증명서'들과 의견을 모아, 함께 할머니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큰 고민에 빠졌다.
할머니의 증명서 실체는 생각 보다 더 마음 아프고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내가 지켜보았던 할머니는 자식들을 심하게 차별하지는 않으셨지만 큰 아들'박일섭'에게 더 강한 애착과 기대를 가지고 계셨다. 할머니의 눈에는 항상 '박일섭' 큰 아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기대, 그리고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그들 사이에 깊고 끈끈한 유대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의 기대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박일섭' 그는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재는 우리 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할머니와 '박일섭'을 이해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지금 그를 그리워하실까? 아니면 그도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숨겨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 도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 냉정하게 만들었을까?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하며 요양병원의 방 한구석에서, 나는 할머니의 쓰러졌던 과거를 회상하며 마음 아파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의 큰 분노를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다.
결국 요양병원에서의 마무리는 할머니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밖을 나서게 되었다.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박일숙' 큰 이모 얼굴에 지난 시간 동안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흔적이 뚜렷이 스며 있었고 그렇게 길게 머물렀던 요양병원의 냉기와 흐려진 유리창 너머의 풍경으로부터 천천히 차가워져 가는 것 같았다.
"나도 힘들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요양병원을 나섰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의 그녀는 그 어떤 무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무게는 '할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 자식 박이숙'에게 온전히 돌아와 앉아버렸다.
요양병원은 묘한 침묵으로 가득 찼고 통로에는 누워 있는 환자들의 숨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내 '나의 가족관계증명서 母 박이숙'의 집으로 오게 되어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바로 나의 앞에 현실로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