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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필 Sep 11. 2023

PART2. 죽이고 싶은 가족관계증명서

'박일섭'의 가족관계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상세)

등록기준지 강원도 행복 군 가왕면 하면리

본인 '박일섭' 1966년 08월 18일 660818-*******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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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부 박남일 사망

모 최영월 1939년 03월 01일 390301-*******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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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임정순 1966년 09월 18일 660918-*******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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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박지나' 1990년 04월 20일 900420-******* 여

자녀 '박일규' 1992년 06월 10일 920610-******* 남


사실이 아닌 소설 속 내용입니다.


PART2. 죽이고 싶은 가족관계 증명서

'박일섭'의 가족관계증명서


대부분의 가족 구조에서는 세대나 문화에 따라 특정 성별이나 자식에게 다르게 대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과거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아들에게 특별한 기대나 부담이 주어지곤 했으며, 딸이나 손녀에게는 그러한 기대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수 있다. 할머니 역시 그런 가족 구조 속에서 삶의 뿌리를 버텨 왔다.


하지만 내가 할머니에게 느꼈던 감정 안에는 여자, 딸, 손녀로서 차별대우를 받거나 무시당하였다고 생각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할머니의 행동이나 태도, 그리고 할머니의 언어에서 무언가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내가 상처의 감정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한 아이에게 더 큰 걱정이나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유독 아픈 손가락'은 그 아픔 때문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데 할머니의 큰 아들 '박일섭'이 딱 '유독 아픈 손가락' 이였던 것 같다.


눈빛과 행동에서 '박일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지켜본 나는 어쩌면 '박일섭'을 향한 그런 특별한 애정은 고된 삶과 세대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1950년, 한국은 남과 북 간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할머니의 가족은 북한의 한 조용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뜻밖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 평온한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할머니는 그 시절의 사건들을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의 한국은 온통 황폐한 모습으로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무너뜨렸고, 그들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 시간조차 없이 바로 생존을 위한 싸움에 돌입해야 했다. 할머니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재산도 모두 잃어버린 가운데, 당시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은 정말 힘들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그런 어려운 시기에 버티고 버티다 가족을 위해 선택한 나름의 방법이 자식들의 결혼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17살이 되던 해 중매를 통해 '박남일'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게 되어 시댁인 인천 강화도의 한 마을로 그곳에 '박일남'의 큰 형님 집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당시 함께 살아야 할 식구가 무려 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살이 되고 첫 아이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큰 형님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시집살이가 심했냐 하면, 할머니는 항상 집에서 깨끗이 닦여야 하는 바닥, 매일 빨아야 하는 빨래, 그리고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밥솥 앞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항상 고된 일과 큰 형님의 폭력으로 손과 발 그리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큰 형님은 종종 가족들의 불만이나 어려움에 대한 원망의 대상을 할머니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거나, 다른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마다 온전히 할머니에게 비난을 쏟아 내곤 했는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원망이 단순한 말뿐만 아니라 할머니에게 실제로 물리적인 고통을 주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미 가족 간의 갈등과 힘든 일상에 지쳐있는 할머니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기대와 사랑이었던 첫 딸이 3살이 되던 그 해,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런 아픔 앞에서 할머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에 휩싸였다.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첫 딸을 보내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똑같은 일상을 지내다가 '박이숙'을 낳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고된 인생은 두 번째 딸 '박이숙'을 낳아도 변하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또 흘러 큰삼촌 '박일섭'을 낳게 되면서 큰 형님 댁에서 분가할 수 있게 되었다. 분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할머니는 그 '덕'이 '박일섭'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박일섭'은 그렇게 할머니의 삶 그 자체가 되었고 할머니는 '박일섭'이 태어나면서 할아버지의 대를 이었다는 큰 형님 댁의 인정과 그 시대 여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훈장을 받은 것이었다.




'박일섭' 그는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모범생이였는데 대학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경제 상황이 급격히 어려져 사는 것이 막막했던 할머니는 큰 아들'박일섭'을 대학에 보내 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박일섭'이 대학에 가고 싶었을 텐데 말도 못 꺼내고 공장에 취직한 것이 마음 아프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딱히 직업이 없으셨던 것 같다. 뭐랄까 '홍반장' 같은 느낌이랄까?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전구 교체, 집수리와 같은 각종 소작업을 맡아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소정의 수익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니라서 일이 없을 때에는 여유를 갖고 동네 분들과 자주 약주를 즐기셨다고 했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셨다. 남의 집 밭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직접 두부와 콩나물을 제작하여 판매했으며, 누에고치의 실크를 뽑아 판매도 했다. 그저 들어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노고가 돋보이는데, 할머니는 그런 일을 대부분 혼자 해내셨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급격하게 어려워졌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할머니는 매일 약주를 즐기셨던 할아버지였어도 할아버지가 정신적인 기둥이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공백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물질적인 손실보다 더 큰 아픔과 충격, 그리고 상실감을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학을 보내주지 못한 것이 본인의 탓이라 생각하는 할머니가 싫었다. 그 시대 최선을 다한 할머니가 왜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건지 그런 할머니가 밉고 이런 할머니에게 감정을 만들게 한 할아버지와 큰삼촌 '박일섭'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지금 할머니의 삶과 자랑 큰 아들 '박일섭' 그는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술을 마시며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마치 그의 인생에 원래 할머니가 없는 것처럼...


그런데도 할머니는 '박일섭'에게 미안해 하고 그를 그리워 하며 걱정하고 있는게 너무 싫다.



'박일섭'의 멋있던 카레


나는 '박일섭' 그를 정말 미워하고 증오한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큰삼촌'박일섭'을 죽도록 미워하진 않았다. 어린 시절, 돌이켜 보면 막내 이모와 막내 삼촌은 도시로 나와 지낼 곳이 없어 '나의 가족관계증명서 母 박이숙'과 함께 살았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은 자주 모이는 일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큰 삼촌네 집에 모였다. 


그 집은 차로 단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나의 동생들과 나이가 비슷한 사촌들이 살았기에, 주말이나 방학 때면 자주 그들과 놀러 갔다.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어른들은 저녁을 맞아 술상을 차리고 분위기 있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 사이 나와 동생들, 그리고 사촌들은 방에서 신나게 놀다가 눈이 감겨 큰삼촌 집의 아늑한 방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어른들은 안계셨고 동생들은 조용히 거실에서 앉아 TV도 켜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내 동생이 내게 속삭이듯 "언니, 큰 외숙모가 조용히 있으래~"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도 거실에 조용히 앉아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배가 고프기 시작했는데, 숙모의 딸이 주방에서 간식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안방으로 가며 소심하게 "엄마, 배고파"라며 말했다. 숙모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한숨을 쉬고 일어나 주방으로 가 큰 그릇에 우유와 콘푸라이크를 담아 애들 앞에 놓았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우리는 콘푸라이크로 배를 채웠지만, 숙모의 눈치가 너무도 많이 보여 이내 거실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집어 엄마에게 전화하며 아주 조용히 빨리 와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나는 숙모의 행동이 미스터리처럼 남아 있다. 숙모는 글을 쓰는 작가인데 박수를 받으며 글로 상도 받고 숙모의 글 속 세계는 깊고 넓었다. 그런데 숙모의 일상은 남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는 달리 항상 예민한 듯, 감정의 변화가 심했다. 그리고 숙모가 밥을 지었거나, 빨래를 널었거나, 설거지를 하는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 집안일은 숙모에게 마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제사나 차례 때, 가족 모두가 모여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숙모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면 숙모를 이해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숙모를 모르겠다. 더구나 그 어린 딸과 아들, 그리고 우리 조카들이 배가 고프다 해도 귀찮아하시며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숙모의 모습은, 엄마라는 이름도 어른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았다. 숙모는 왜 그렇게 차갑고 무정했을까?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나에게는 미지수이다.


이후 눈치가 보였던 우리는 놀이터로 나가 놀다가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서 큰삼촌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여전히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고요한 거실에 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동생들은 점점 불안해져 나에게 집에 가고 싶다며 엄마에게 전화해 보라고 칭얼거렸다. 이내 숙모의 딸, 나의 사촌 또한 나와 동생들의 눈치가 보였는지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고 그 후 숙모가 방에서 나와 자신의 딸인 우리 사촌에게 냉장고에 붙어 있던 한 묶음의 쿠폰을 주었다. 


 신이 난 숙모의 딸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고 치킨을 주문해 저녁을 해결했다. 하지만 쿠폰으로는 한 마리만 주기 때문에 4명의 아이들이 먹기에는 부족했다. 치킨을 앞에 놓고도, 나와 사촌은 동생들에게 더 양보하며 대부분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치킨을 살짝살짝 떼어먹었다.


이후 큰삼촌이 들어와 우리의 모습을 보곤 아무 말 없이 집안을 정리하였다. 그리곤 첫마디가 '삼촌이 맛있는 거 개발했는데 만들어 줄게'라며 정말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삼촌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몇 분 후, 손에는 삼촌이 말했던 새로운 카레를 들고 나왔다. 그 순간, 그 카레 앞에서 모두의 기대감과 호기심이 가득 찼다. 나의 눈에는 그 카레가 그 어떤 레스토랑에서 먹는 카레보다도 더욱 특별하고, 더욱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형편없는 맛의 카레였어도 확실한 내 기억에는 제일 멋있는 카레로 기억이 난다. 첫 숟갈을 먹어보니,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익숙한 맛이 전혀 아니었고, 사실 맛 자체는 별로였다. 그러나 나의 동생은 그 맛을 좋아했다. 아마도 그 순간, 그 카레는 동생의 입맛에 딱 맞았던 것 같다. 그것이 그날의 충격 그리고 큰삼촌의 손에서 나온 따뜻한 정성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카레를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상황과 그 공간에서의 모든 감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준 그 특별한 카레 때문에 그날을 잊지 못한다.



'박일섭' 그가 기억 못 하는
나의 상처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어린 시절, 큰삼촌 '박일섭'을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은 카레 이야기 그 시기뿐이었다. '박일섭'의 행동으로 나와 내 가족이 받은 상처들은 셀 수 없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나와 아빠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그의 무심함, 나의 동생에게 하찮은 학교를 다닌다며 무시한 그의 오만함, 할머니의 순수함을 이용해 통장에서 돈을 꺼내어 그것이 할머니가 주신 것이라고 거짓말한 그의 비열함, 그리고 무엇보다 아픈 할머니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보조식품을 준 그의 무책임함. 이 모든 일들이 상처를 남겼지만, 이러한 사건들 중에서도 특히나 더 아프고 나를 극도로 화나게 만든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큰삼촌 '박일섭'의 거짓말로 인해 나와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빠는 사업이 망하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쉬지않고 그 빚을 갚기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열심히 잠도 줄여가며 일을 했고 10년만에 모든 빚을 청산했다. 그래서 나는 빚을 모두 청산한 그날을 잊지 못 한다. 우리 가족들은 정말 많이 기뻐하며 함께 울음을 터뜨렸고 우리 가족에게 큰 성취감과 해방감을 주면서 서로를 응원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은 이웃분과 빚을 다 청산한 기념으로 함께 첫 해외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큰삼촌은 나의 부모님을 조롱하며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내 와이프 명의로 빌린 은행 빚은 갚지도 않고 여행을 간다니, 염치 없는 것들 내가 지역사회에서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라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박일섭'의 언행은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그 조롱의 언행은 내 부모님의 고생과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을 통해 이룬 결과를 한순간에 무너 뜨리는 말 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아빠는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박일섭'의 주장이 내게는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빠의 반응은 확고했다. 그는 그런 빚을 빌린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단언했다.  '살면서 가족 누구의 이름으로 돈을 빌린 적은 없다.'는 아빠의 목소리에서 확신과 동시에 분노와 당황이 느껴졌다.그러면서도 아빠는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지인을 통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로, '박일섭'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임이 밝혀졌다. 나의 믿음과 신뢰가 흔들린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무참한 거짓말로 인해 우리 가족이 겪었던 상처와 수치는 쉽게 치유될 수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여러 사람들을 통해 '박일섭'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가 지역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지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에서 분명해졌다. 그는 거짓말과 허풍을 일삼아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의 갈등과 싸움도 많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박일섭'의 그런 행태는 단순히 우리 가족에게만 겨냥된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습관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여러 번의 거짓말과 갈등으로 인해 지역사회에서도 그의 신뢰도는 매우 낮아졌고,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박일섭'의 행동과 그의 감정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왜 자신의 여동생, 즉 나의 엄마를 깎아내리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를 폄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행동을 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일까? 그를 이해하려고 정말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남겨 보았지만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사건인 아픈 할머니를 버리고 나와 내 동생의 삶을 바꿔 놓았다.


우연히 동생 '은주'와 지나가다 회식으로 술에 만취된 큰삼촌을 만나 인사를 했는데 그 주위 사람들이 "가족들 예기 많이 들었어요~ 삼촌한테 진짜 잘해야 돼요! 가족들 다 부양하시고 무슨 일 있으면 다 해결해 주시잖아요~ 진짜 가족들 위해서 사시는 분인데 조카들 잘해야 돼요!"라고 훈수를 두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기가 막혀서 정말 화가 나서 미칠 거 같았다.


가족들을 위해 사는 그 인데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실때, 집으로 가시는 날까지 얼굴 한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엄마가 할머니의 상황을 직접 논하기 위해 '박일섭'에게 전화로 만나자고 제안했고 그때 분명 통화하는 것을 나와 여동생'은주'가 들었다.


 그리곤 엄마가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약속을 잡아 그날, 막내이모 '박삼숙'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저녁시간 내내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박일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엄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는 "무슨 약속인지 몰라. 처음 듣는 소리야." 라며 발뺌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만나자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 응해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날도 박일섭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그는 여러 번의 약속을 피하고 회피했다. 주말 농장에서의 취미 생활을 핑계로 그는 가족의 중요한 약속도 무시했다.


가족 간의 문제, 할머니의 건강 상황, 모든 것을 논의하려던 중요한 회의에서 그의 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엄마는 몇 번이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의 태도는 계속해서 냉담했다. 결국 그의 부재와 무관심은 할머니 자식들 가족 간의 관계에 큰 균열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저 큰아들만 기다리고 바라보고 있어 안타깝고 미웠다. 


난 솔직히 큰삼촌 '박일섭'이 할머니를 우리 집에 버렸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아들인 '박일섭'이 할머니를 모셔야 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단지, 의논을 하자고 했는데 무시하며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행동 들과 병원에서부터 할머니가 '박이숙'의 집에 와서 지내고 있는 그 시간에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기에 할머니를 버렸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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