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표를 가장 많이 던진 관리

어느 시대에나 다니던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by 두류산

조선의 선비들은 출처(出處)의 때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어느 시대에나 다니던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조선 시대 관리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은 더욱 기백이 필요했다.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과거시험을 통과했는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경쟁률이었다. 더구나 한 번 떨어지면 다음 시험 응시를 위해 대개 3년을 기다려야 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기라도 하면 각각 3년씩 햇수로는 6년을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아무 성취도 없이 세월을 흘러 보내며 나이만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조선시대 관리의 사표는 오늘날 공무원의 사표와는 또 다른 결단이 필요했다. 오늘날 공무원은 사표를 내어도, 기업으로 옮긴다든지, 유학을 간다든지 대안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공직이 아니면 집에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어찌 보면 글을 읽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도 경제사정이 허락해야만 가능했다.


조선 시대에 정태화만큼이나 사직 상소를 많이 올린 관리가 없었다. 인조와 효종, 그리고 현종의 3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그는 벼슬자리에 올라 평생에 걸쳐 사직을 각오하고 살았으며,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만 해도 40번이 넘게 임금에게 자리를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 때의 명신(名臣)인 영의정 정광필의 5대 손인 정태화는 1628년 인조 6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 9품 승문원 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 정태화는 도원수 김자점 밑에서 종사관으로 근무하면서 황해도의 여러 산성에서 병사와 함께 항전한 기개 있는 선비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 문신으로서 장수)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당당히 뽑히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이 높아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가, 병자호란이 끝나고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해 청나라 심양으로 갔다. 그 뒤 귀국하여 충청도 감사에 이어 평안 감사가 되었다.


인조 18년 12월, 병자호란의 선봉장이었던 용골대가 청나라의 사신으로 왔다가 귀국길에 평양을 들렀다. 당시의 평안감사는 정태화였다.

용골대는 3년 전 조선의 항복을 받고 철수하다가 포로로 잡은 남녀 3인을 역관에게 주었는데 역관이 그들이 도망갔다고 고하니 평안감사 정태화와 평안 병사에게 책임을 물으며, 협박하였다.

"포로들의 값은 백금 3만 냥이 넘을 것이다. 반드시 그 값을 갚으라. 만일 갚지 못하면 감사와 병사는 나와 같이 심양으로 들어가 3만 냥을 납부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정태화는 용골대의 협박에 두려운 기색 없이 단호하게 답하며 나무랐다.

"심양으로 가기는 어렵지 않으나, 백금 3만 냥을 준비하기는 어려운 일이요. 꼭 우리와 같이 압록강을 건너고자 하면 어찌 감히 거부하겠소. 하지만 역관이 아직 있는데 그 사람에게 묻지 않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 것이오?" (인조실록, 인조 18년 12월 18)


정태화는 평안 감사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청나라 사신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용골대는 정태화가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출처(出處), 즉 벼슬에 나아가는 것과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학문을 닦은 연후에 배운 바를 널리 실현하기 위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치는 것은 선비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런데 정태화는 왜 어렵게 얻은 관직을 그만두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직상소를 올려야 했을까?

벼슬길에 오른 관리는 자신의 잘못이든, 부하의 잘못이든,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있다. 정태화는 벼슬길에 올라 잘못된 일이 있으면 스스로 책임지기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가 왕의 잘못을 간하고 관리를 탄핵하는 사간원의 정 5품 헌납으로 있을 때였다. 선산에 문제가 있다는 다급한 소식을 듣고 미처 정식으로 휴가를 내어 허락을 받지도 않은 채 선산에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마침 선산이 한양과 가까운 과천이어서 하루 안에 신속히 다녀올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다. 선산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성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사사로운 일을 앞세워 국법을 어겼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의 직책은 법을 지키지 않는 관리들을 탄핵하는 간원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 국법을 범했다 하여 사직서를 제출했다.

"신은 선산이 과천에 있는데 급히 가서 살필 일이 있어 미처 휴가도 청하지 않고 사사로이 갔다가 왔습니다. 마음대로 외방으로 나가 국법을 함부로 어겼으니 신을 파직하여 주소서." (인조실록, 재위 12년 윤 8월 22일)

인조는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나, 스스로 죄를 고하고 파직을 요청한 것을 평가하여 자리를 유지하게 했다.


정태화는 자신의 역량보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을 두렵게 여겼다. 스스로 판단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에 임명되면, 관직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가 부족하다고 사양하며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정 3품의 승지에서 종 2품의 한성부 우윤으로 발탁되자 상소를 올려 새로 제수한 관직을 거두어 줄 것을 임금에 청하였다. 임금은 정태화의 상소의 말미에 답하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경의 재주는 실로 발탁해 쓰기에 합당하니, 사직하지 말라." (인조실록, 재위 18년 1월 23일)


인조는 이후 그를 6조의 판서를 골고루 시킨 후, 이조판서에서 우의정으로 정승의 반열에 올렸다. 하지만 그는 재주가 부족함을 이유로 사양하며 사직상소를 올렸다. 임금은 정태화에게 따뜻한 말로 격려하며 사직 상소를 돌려주었다. (인조실록, 재위 27년 1월 16일)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은 정태화를 좌의정으로 불렀다가, 이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정태화는 이번에도 역량 부족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며 사직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김자점과 그의 아들이 역모를 일으킨 일을 말하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경은 이와 같이 겸양하는가. 나의 부덕함으로 인하여 이런 참혹한 변고를 만났기에, 밤낮없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하늘을 우러르니 부끄럽고 통탄스러울 뿐이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국정을 의논하고 과인의 허물을 바로잡아주어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그리하여 선왕께서 경을 알아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위 사람들의 목마르는 듯 한 바람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효종실록, 재위 2년 12월 7일)


(다음 편에 계속)





(일러스트 출처)

https://economist.co.kr/2016/05/08/finance/bank/311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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