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표를 가장 많이 던진 관리 (2)

임금이 사직 상소를 읽고, 사관을 집으로 보내어 사직을 말렸다

by 두류산

벼슬을 욕심내지도 연연하지도 않았다


정태화는 인조 때 대사헌,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그의 나이 마흔여덟이 되는 1649년 인조 27년, 우의정 자리에 올랐다.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직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1651년 효종 2년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654년 효종 5년 2월, 영의정 정태화가 사간원의 하급 관리인 정 6품 정언(正言)의 탄핵을 받아 조정이 술렁거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조판서가 술과 악공을 준비해 영의정 정태화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즐긴 일이 있었다. 당시의 병조판서는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위하여 어영대장을 지낸 원두표였다. 이 사실이 사간원의 정언 이상진의 귀에 흘러들었다.


이상진은 곧바로 임금에게 정태화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가만히 듣건대, 병조 판서 원두표가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기악(妓樂)을 챙기어 영의정의 집으로 가서 한바탕 술자리를 벌였다고 합니다. 품계가 높은 중신이 어떻게 감히 주찬(酒饌)과 기악을 준비하여 정승에게 아첨할 수 있으며, 정승도 또한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세종 때 호조 판서 김종서가 물을 만 밥을 정승 황희에게 올리자, 황희가 그것을 물리치고 종서를 불러 뜰아래 세워 놓고서 아첨한다고 꾸짖었으니, 지금까지 전해 오면서 이야기하며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는데, 두 신하들은 어찌 그것을 듣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두 신하의 이런 일로 조정의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나약한 풍습이 더욱 한탄스럽습니다.”


정태화는 이상진의 상소에 부끄러워하며 즉각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효종이 답을 내렸다.

"이상진의 말이 망령되어 두서가 없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다. 심지어 과인을 진나라 이세(二世)에게 비하여 곤욕을 주기까지 하였으니, 과인인들 어찌 노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너그러이 그를 용납하여 준 것은 언로(言路)를 위해서였다. 경도 나의 뜻을 본받을 수 없겠는가.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효종실록, 재위 5년 2월 12일)


효종 3년 초겨울에 여름의 장마 비처럼 세찬 비가 오랫동안 내리고 번개마저 치는 무서운 날씨를 보였다. 영의정 정태화는 하늘의 견책을 두려워하며 좌의정 김육(金堉)과 상의하여 함께 사직상소를 올렸다.

"하늘이 이상 기후의 조짐을 보인 것은 실로 변변치 못한 자가 외람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우러러보아 두렵고 굽어보아 부끄러우니 어찌 감히 낯을 들겠습니까. 겨울철인 지금 장마가 여름 같고 번쩍이는 번개가 발생하였는데,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땅의 음기가 위로 새고 많은 백성이 거처 없이 떠돌며 나쁜 안개가 컴컴하고 천둥이 소리를 낸다고 한 것들은 다 정치가 시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어떤 두려운 변고가 어둠 속에 숨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벼슬을 파면하여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정승을 삼고, 언로를 활짝 열고 백성의 고통을 부지런히 보살펴서, 재앙이 사라지게 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효종실록, 재위 3년 10월 16일)


조선시대는 가뭄이나 물난리 등 재앙이 닥치면, 하늘과 사람 사이에 서로 통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땅에서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면, 하늘이 격동하여 재난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 한(漢) 나라의 대표적 유학자인 동중서의 주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동중서는 하늘과 인간은 교감한다는 천인 감응설(天人感應說)과 잘못된 정치는 홍수나 가뭄, 지진 등의 자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재이설(災異說)을 주장하였다. 동중서는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내려 견책하므로, 왕과 조정의 관리들은 하늘의 뜻을 살펴서 반성하고 잘못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교문화권의 국가들은 동중서의 이론에 따라, 극심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정승들을 교체하여 민심의 동요를 막기도 하였다.


임금이 두 정승의 사직 상소 말미에 답을 내려, 상소를 돌려주었다.

"근심과 두려움이 지극할 때에 경들의 글을 보니 더욱더 두려워 삼가게 된다. 이것은 다 과인이 덕이 없어 하늘에 죄를 져서 그런 것인데, 경들이 어찌하여 스스로 잘못을 책임지려 하는가. 사직하지 말고 덕이 없는 과인을 도와야 할 것이다.” (효종실록, 재위 3년 10월 16일)


영의정 정태화가 병이 들어 등청하지 못하게 되자,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이 과분하게 본직에 있음으로부터 재변이 자주 나타나고 기강이 퇴폐하여, 조정안의 체통이 날로 무너지고 사대부 사이에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며, 공사(公事)가 사사(私事)를 이기지 못하고 일이 착실하게 되지 못하여 점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신처럼 부족한 사람이 오랫동안 조정의 수상(首相)이 되어 자리를 더럽힌 소치입니다. 또 몸의 병이 이미 고질화 되어 힘을 펴 반열에 나아갈 수 없으니, 신의 직책을 속히 거두어 병든 몸을 살려주소서.”


효종이 상소를 읽고 답하며, 사관을 집으로 보내어 사직을 말렸다.

"아, 경이 과인의 지극한 정성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겸손하다. 경이 등청하지 않은 뒤로부터 팔다리를 잃어버린 것과 같아 어떻게 조처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어찌 물고기가 물이 없고 소경이 인도자가 없는 정도에 비유하겠는가. 기강이 퇴폐하여 조정에 좋은 풍습이 없는 것은 모두 과인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경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여야지 어찌 한가히 집에서 지낼 것을 요청할 수가 있겠는가. 속히 과인과 함께 나라를 다스를 이치를 논하여, 과인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효종실록, 재위 5년 1월 10일)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한 후 영의정으로 임금을 2년 동안 보필하다가, 정태화는 20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려 드디어 임금이 그의 마음을 편케 해주려고 허락하였다. 이때 사관이 이 사실을 두고 논하였다.

“정태화는 총명하고 영민할뿐더러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으므로 벼슬 초기에 이미 정승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인조 말년에 드디어 처음으로 정승이 되어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는데 어느 신하보다도 융숭한 총애를 받았다. 집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공손하고 겸손하게 대하고 작위가 높다고 하여 거만을 피우지 않았으며, 손님을 맞이할 때에도 문에서 손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시론(時論)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몇 번이나 위기상황을 맞았어도 계속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고 영화롭게 현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벼슬살이 잘하는 자를 칭할 때에는 반드시 그를 으뜸으로 꼽았다.” (현종실록, 재위 2년 윤 7월 22일)


그는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 정책과 예송(禮訟)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어 어려운 시기에 당파를 떠나 조정의 수상(首相)으로서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반목을 잘 조정하였다.


그가 죽자 사관은 이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정태화는 재주와 지혜가 넉넉하고 총민(聰敏)함이 뛰어났으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적절히 대처하였으므로 낭패당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가정을 법도로 다스렸고 자제들을 단속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치 못하게 하였으며 붕당을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의정부 정승이 된 기간이 25년이나 되었는데도 대단하게 세력을 과시한 적도 없었다. 사신이 살피건대, 국가가 효종 이래로 조정에 청의(淸議. 뜻이 높고 올바른 논의, 예송논쟁을 의미함)가 크게 행해졌는데 식자들은 사화(士禍)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상당히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정태화가 수상(首相)으로서 그 사이를 잘 주선하였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때를 당하여 만약 정태화가 없었던들 응당 을사년과 기묘년 정도에 그치지 않는 참혹한 사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4년 10월 8일)


정태화는 높은 벼슬을 욕심내지도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벼슬을 골고루 하고 영의정만 5번을 했다. 그는 우의정으로 정승 자리에 오르기 전에 다양한 주요 관직에 등용되었다. 대사간과 대사헌, 도승지, 충청도와 평안도 관찰사, 정 3품 6조의 참의, 종 2품의 참판, 정 2품의 판서를 모두 지냈다.


오늘날 준비도 부족하고 역량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나방이 불을 찾듯이 고위직을 차지하기 위해 맹렬히 달려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청문회에서 여러 가지 비리와 자격 미달로 망신당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면 수백 년 전에 정태화가 벼슬에 대해 보인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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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출처)

https://economist.co.kr/2016/05/08/finance/bank/311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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