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기회를 얻다 (5)

토벌군 사령관 이준은 유자광을 선봉으로 삼아 적진을 돌파하게 하였다

by 두류산

22장


전선에서 밤낮없이 말을 몰아 도성에 도착한 유자광은 다음날 다시 북방의 전쟁터로 떠날 차비를 차렸다. 세조는 도총사 이준에게 보내는 서찰을 통해 속전속결을 지시하였다. 임금은 요청한 원군을 보내니 잘 활용하라고 말하고 자세한 내용은 유자광에게 들으라고 하였다.

"이제 군사 1천 명을 더 보낸다. 함흥 이남의 여러 고을을 군사로써 지키지 않는다면 뜬소문에 영향을 받게 될까 염려된다. 함흥 이남 모든 고을의 토병(土兵)을 뽑아서 종군하게 하고, 경군(京軍)을 여러 고을에 남겨서 백성이 반역하는 마음이 다시 생기지 않게 하라. 자세한 것은 유자광이 직접 전할 것이니, 그대가 그것을 듣고 시행하라.”

유자광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며 씩씩한 목소리로 청하였다.

"이번에 북방의 전선에 가면 반드시 큰 전투가 벌어질 터인데 저도 참전하여 역적의 목을 바쳐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세조는 기백이 넘치는 유자광의 말에 파안대소(破顔大笑)로 활짝 웃었다. 임금은 유자광을 격려하고, 전투에 쓸 말과 갑옷을 하사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이 하사한 말을 타고 북방의 전쟁터로 다시 달렸다.

세조는 유자광을 장차 나라의 재목으로 쓰기 위해 예조에 명하여 벼슬길을 터주도록 허통(許通)을 명하였다. 허통은 서얼들의 과거 응시를 제한해 관직 등용을 차단하는 제도를 풀어주는 것을 말했다.

사헌부의 대관(臺官)들은 유자광의 허통은 법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보았다.

"유자광은 천한 노비의 자식입니다. 나라와 사직을 구한 공신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허통이 된단 말입니까?”

"세상은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이 엄격히 구별되기에, 천한 것들이 분수를 넘지 않도록 법으로 정했는데 이를 어지럽힐 수는 없습니다. 주상께 상소를 올려 바로잡아야 합니다!”

대사헌 양성지는 사헌부 관리들로부터 임금의 명을 거스르는 상소를 올리자는 보고를 받고 얼굴을 찌푸렸다.

"주상께서 인재를 아끼는 마음으로 허통을 하셨는데,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신하 된 자의 도리가 아니오.”


유자광은 임금의 서찰을 품에 지닌 채 밤새도록 말을 달려 북방의 전선에 도착했다. 말위에서 뛰어내려, 땀으로 젖은 몸을 닦지도,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도총사 이준에게 임금의 서찰을 전했다.

남이와 이숙기는 꿇어앉아 임금이 내린 교지(敎旨)를 받고 승진의 기쁨을 누렸다. 남이와 이숙기는 임금 앞에서 자신들의 무용담을 언급하여 승진하도록 도와준 유자광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유자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하께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남이는 이준에게 불만이었다.

‘장계를 올릴 때 우리의 공을 상세히 보고하지 않고, 어떻게 일개 겸사복의 말을 통해 주상이 알도록 하는가.’


유자광은 생각에 잠겨있는 남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군님과 저는 서로 인척입니다.”

남이가 어리둥절해하자 유자광이 웃으며 말했다.

"나의 할아버지인 두자(斗字) 명자(明字), 유두명(柳斗明) 조부가 장군의 조부이신 개국공신 재자(在字), 남재(南在) 할아버지와 처남 매부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북방의 전쟁터에서 인척을 만나다니, 반갑소.”

남이는 호탕하게 웃으며 유자광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준은 총공격령을 내렸다. 유자광이 출전을 자원하니, 이준은 유자광에게 하층민 위주로 편성된 부대인 파적위(破敵衛)를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였다.

파적위는 지리적으로 산악 지대가 많은 조선의 자연조건에 비추어 보병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세조가 새로이 설치한 보병부대였다.

유자광은 ‘적을 격파하는 부대’라는 이름의 파적위를 지휘하게 되자 매우 흡족하였다. 유자광의 파적위가 선봉으로 나서고, 관군이 모든 힘을 집중하여 총공세를 퍼붓자 반란군은 버티지 못하고 전선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기세를 몰아 압박하여 이시애의 반군과 거산현(居山峴)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시애는 지형이 높고 험한 만령(蔓嶺)에 웅거 하여 2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맹렬히 저항하였다.

토벌군 사령관 이준은 유자광을 선봉으로 삼아 적진을 돌파하게 하였다. 유자광과 관군은 산 위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돌과 화살을 뚫고 공격해 올라갔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시애가 죽을힘을 다하여 항전하여 적진을 격파할 수가 없었다.


이준은 총통군으로 적진을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어 혼란하게 하고, 산악 지형을 잘 아는 함길도 출신 겸사복들로 하여금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총통군은 적진에서 활과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자, 정신을 못 차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높이 쏘기도 하고 혹은 가로질러 쏘기도 하여, 제대로 적진에 맞히는 일이 없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관군은 산의 중턱에 진을 친 반란군을 격퇴하고자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아래에서 위를 보고 공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준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군사를 쪼개어 동쪽 산봉우리를 돌아 적이 포진하고 있는 산봉우리의 좌측 진(陣)에 돌격하게 하였다.


좌대장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풀과 구분하지 못하도록 푸른 옷을 입혀 위장을 한 후, 배에 태워 산봉우리 뒤쪽으로 상륙시켰다. 어유소의 군사는 벼랑을 따라올라 접근하여 기습적으로 적의 배후를 쳤다. 드디어 유시(酉時, 저녁 6시경) 경 토벌군이 적진의 허를 찔러 한쪽 면(面)을 돌파하였다.

반란군은 당황하였고 이에 유자광은 고함을 지르며 군사들을 몰아 공격해 올라갔다.

"적의 측면이 뚫렸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유자광의 파적위가 반란군이 견고하게 지키던 최전선 방어망마저 허물어뜨리자 여러 군사들이 함께 함성을 지르며 일시에 돌진하였다. 군사들은 북을 둥둥 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돌격을 하니, 함성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드디어 관군이 일제히 산 위의 적을 크게 쳐부수니, 살아남은 적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말을 타고 도망하였다.


유자광이 달아나는 이시애와 반란군을 추격하였으나 이미 어두워져, 이준은 징을 울려 관군의 추격을 중지시켰다. 이시애를 끝내 잡지 못했지만 치열하게 전투를 한 유자광은 땀에 젖은 투구를 한 손에 벗어 들고 한 손으로는 부대의 기(旗)를 높이 들어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으로 외쳤다.

"사람이 천지간에 남아로 태어나고, 미천한 몸으로 주상전하의 지극한 인정과 은혜를 입었다. 몸이 변방에서 전투 중에 죽어, 시체가 말가죽에 쌓인 채 고향에 돌아가 묻히지 않는다면 어찌 장부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토벌군은 민정이 상소에서 제시한 수륙양면작전을 함길도 만령 전투에서 실지로 활용하였다. 반란군은 천혜의 요새에서 방어를 하니 관군의 공격과 접근이 어려웠다. 좌대장 회령 부사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작은 배에 태워 봉우리 뒤쪽에 접근하여 벼랑을 따라 올라 적의 배후를 쳤다. 이에 놀란 적군은 당황하였고 수륙 양방향 협공으로 토벌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만령 전투를 묘사한 내용은 고려에서 조선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은 그림첩인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서 볼 수 있다.


토벌군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무너뜨리자, 이시애는 길주와 경성(鏡城)을 거쳐 국경 넘어 여진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부하들의 배반으로 관군에게 넘겨졌고,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세조는 지방 수령의 자문기관으로 아전과 백성을 규찰하고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전담하던 전국의 유향소를 모두 폐지하였다. 이시애가 유향소를 민심을 선동하고 교란하는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도총사 이준, 강순, 남이 등이 반란군을 토벌하고 한성에 돌아오니, 세조는 술을 하사하여 동교(東郊, 지금의 청량리 지역)에서 맞이하게 명하였다. 이준이 궁궐에 들어와 역적 토벌의 결과를 보고하니, 세조는 이준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잔치를 베풀었다.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인사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뒤따랐다. 세조는 토벌군으로 참전한 무인들을 중심으로 ‘적에게 성을 낸 공신’이라는 뜻의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했다. 일등 공신에는 귀성군 이준과 강순, 남이, 어유소, 이숙기 등이 포함되었고, 김국광과 어세공 등을 이등 공신으로, 영순군 이부 등을 삼등 공신으로 삼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 주고, 품계를 올려 주었다.


하지만 유자광은 궁궐과 전선의 연락에 만전을 다했고, 파적위를 거느리고 선봉에서 이시애군을 압박하는데 공을 세우는 등 반란군 토벌에 큰 활약을 하였음에도 공신 책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유자광은 분하고 억울하였다.

‘내가 천출이라고 그리 된 것인가.’


세조는 공신 명단에 유자광의 이름이 없는 이유를 짐작하여 따로 문제 삼지 않고, 대신에 공을 따져 품계를 4품으로 올려주게 하였다.

사관은 논공행상에 문제점이 많았음을 지적하였다.

"공이 있는 자가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가 이름을 올렸다. 해당된 사람들이 분하고 원통함을 품거나 눈물을 흘린 자까지도 있었다.”

세조를 이어 즉위한 예종은 유자광을 적개공신(敵愾功臣) 이등으로 공신록에 추가로 올려주었다. 이시애 난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은 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세조는 새롭게 공신에 책봉된 종친 세력과 무인 세력 여러 명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였다. 종친인 이준을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강순을 우의정으로, 이숙기를 이조참판으로 하였다. 이로써 세조의 즉위를 도운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인 구공신이 장악하던 조정의 권력 지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남이는 인사 발표를 접하고 할 말을 잃었다.

‘귀성군이 도총관이 되었는데, 나는 아무런 직책이 없다? 내가 목숨을 걸고, 심지어 화살을 맞아가며 반란군을 물리쳤을 때 귀성군은 무엇을 했는가? 그는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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