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남이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유자광은 남이와 강순 일당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익대는 ‘보좌하여 받들다’는 뜻으로, 익대공신은 종묘사직을 지켜낸 공신이라는 뜻이었다.
1등 공신에는 남이를 잡으러 간 환관 신운, 우부승지 한계순, 한밤중에 불려 와 임금과 궁궐에서 밤을 같이 지낸 신숙주와 한명회도 포함되었다. 밤새 임금의 곁을 지킨 종친과 대신들도 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예종은 유자광의 고변 덕에 역모를 사전에 물리칠 수 있었으니 돌아가신 부왕의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당부가 새삼 생각이 났다.
"유자광은 절세의 인재이니 출신을 따지지 말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대사헌 유자환은 나를 위해 충성을 하였고, 동생 자광은 대를 이어 너를 위해 충성을 할 재목이다.”
예종은 승지를 불러 명하였다.
"익대공신 유자광에게 말 1 필과 백금(白金)을 내려 주어라.”
유자광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글을 올리니, 임금이 술을 내렸다.
남이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1등 공신으로 책봉된 한명회와 신숙주가 함께 임금에게 나아와 아뢰었다.
"신(臣)들은 별로 공로가 없었는데 외람되게 은혜를 받으니 마음에 진실로 미안합니다. 남이와 강순 등이 보성군 부자를 세워 역모를 하였으니, 청컨대 보성군과 춘양정에게 죄를 물어 민심을 편안하게 하소서.”
예종은 두 재상의 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남이의 역모로 연루되어 죽은 자가 많은데, 차마 종친까지 벨 수야 있겠는가? 만약 경들의 청을 따라서 보성군과 춘양정을 베면, 이것이 하늘의 뜻에 부합하겠는가? 다시 말하지 마시오!”
대간들도 보성군 부자를 참(斬)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당초에 남이와 강순이 난(亂)을 꾀할 때에 보성군이 장성한 아들이 많이 있음으로써 우두머리가 되었고, 보성군도 그 아들 춘양정을 보내어 역적 강순의 집에 왕래하였으니, 서로 통한 자취가 매우 명백합니다.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종은 곤룡포의 소매를 펄럭이며 손을 내저었다.
"보성군과 춘양정이 관여되었다는 것은 그 집에 왕래한 것을 말한 것인데, 그렇다면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관여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모두 목을 베어야 하겠는가? 다시 논하지 말라!”
예종은 보성군 부자를 처단하라는 건의를 윤허할 수가 없었다. 보성군은 대행 왕의 사촌 형으로 자신에게는 당숙이고, 특히 세종대왕의 형님으로 종친의 최고 어른이신 효령대군의 아들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은 보성군 부자를 참해야 한다고 상소로 아뢰고, 또한 임금을 알현해서 거듭하여 아뢰었다. 예종은 그들의 청을 되풀이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은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보성군은 역적의 무리에게 추대받은 바가 되었고, 역모에 참여함이 명백합니다. 사사로운 정이 대의(大義)를 이겨서는 안 됩니다. 법대로 참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길에 다니는 사람이 보성군을 지목하며, ‘저이는 역적의 우두머리다!’ 할 터인데, 어찌 신민(臣民)이 보성군과 한 하늘을 같이하겠습니까?”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은 연명해서 상소하여 임금에게 보성군 부자를 참(斬)해야 한다고 청했다.
"대저 악함을 없애는 데에는 반드시 그 근본에 힘쓸 것인데, 작당한 무리들은 처벌을 받았으나 우두머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온 나라 신민이 모두 말하기를, ‘베어야 마땅하다’고 하니, 이는 공론으로 하늘의 뜻입니다. 전하께서는 종친이라고 하여 차마 결단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로부터 난(亂)을 꾀하는 자는 가까운 종친 사이에서 많이 나는 법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써 대의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예종은 상소를 읽은 후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리며 말했다.
"먼 지방에 귀양을 보내는 것은 허락할 수 있으나 참(斬)할 수는 없다. 과인이 이미 용서하였는데 엄하게 처단한다면 이는 신의를 잃는 것이다.”
예종이 유배형을 보내자는 제안을 했음에도, 대간들은 거듭 보성군 부자의 참형을 청했다.
"보성군이 역적의 무리에게 추대받은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죄가 있는데, 하물며 더불어 사귀고 통했는데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사헌 양성지도 나서서 대간들의 말을 거들었다.
"보성군은 강순과 같이 도총부에 근무했으므로, 만일 공적인 말이 있으면 마땅히 도총부에서 말해야 할 것이고 사사로이 집에 서로 왕래할 것이 아닙니다. 보성군은 가까운 종친이고 강순은 군사를 맡은 대장이면서 사사로이 교제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처형을 할 만한 것입니다. 하물며 강순이 먼저 역모를 꾀하는 말을 꺼내어 보성군의 뜻을 시험하였고, 보성군도 말을 듣고 마음이 동(動)하여 춘양정을 보내어 강순의 집에 왕래하였으니, 그 사귀고 통한 자취를 숨길 수도, 덮을 수도 없습니다.”
대사간도 보성군 부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역적 강순이 보성군을 끼고 난(亂)을 선동한 정상을 남이가 명백히 말하였으니 보성군이 역모에 참여한 것은 심히 분명합니다. 마땅히 법으로 처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용서하였다. 보성군의 일은 다시 거론하지 말라.”
대간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들을 찾아다니며 종사의 안정을 위해 보성군 부자를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신들도 이례적으로 대간들과 함께 연명하여 보성군 부자를 참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예종은 끝내 보성군 부자를 참(斬)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귀양을 보내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대간들과 대신들은 한 목소리로 역모의 우두머리이니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보성군은 예종의 은혜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보성군의 부친이며 종친의 최고 어른인 효령대군이 간절히 청하자,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보성군 부자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복권시켰다.
남이의 역모사건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명백히 실패한 반란이었다. 훗날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수많은 선비들이 죽게 되자 사림들은 그를 극악무도한 간신으로 욕하였고, 김종직의 제자 남곤은 원한을 가지고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집필하여 후세에 남겼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野史)는 이런 영향을 받아, 남이의 역모사건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를 죽게 한 날조된 옥사라고 기록했다. 야사(野史)는 남이가 ‘북정가(北征歌)’를 지었는데, 남이를 시기한 유자광이 이 시를 과장하여 남이를 무고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북정가는 남이가 여진족을 정벌한 후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면서 지은 시라고 하였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白頭山石摩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頭萬江水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못한다면 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말하겠는가. 後世誰稱大丈夫
남이의 북정가를 유자광이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이라는 뜻의 ‘미평국(未平國)’ 대신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뜻의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어, 남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 증거라고 무고하여 남이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정가 이야기는 남이의 역모에 대한 추국 과정을 포함하여 조선왕조실록의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