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과연 반역을 꾀하였습니다
남이가 반역한 증거가 점점 드러나자, 예종은 도승지에게 명하여 창덕궁 숭문당 뜰에 마련한 형장(刑場)에서 남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형틀에 묶인 남이는 거듭하여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이 어려서부터 활과 말로써 업(業)으로 삼아, 변경에 무슨 일이 있으면 떨치고 나가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이 평생의 뜻이었습니다. 신은 본래 충의지사(忠義之士)인데 어찌......”
임금은 헛헛한 웃음을 웃고는 남이의 말을 잘랐다.
"네가 스스로를 충의지사라고 하느냐. 헛소리 말고 반역을 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말하라.”
남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자 임금은 곤장을 치게 하였다.
"남이가 이실직고할 때까지 세게 쳐라! 겸사복 문효량이 모두 실토했는데 그래도 네가 언제까지 모른다고 하겠느냐?”
남이는 문효량이 실토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남이는 눈을 질끈 감고 형틀에서 매를 견디다가, 이윽고 머리를 들어 임금에게 말했다.
"원컨대 멈추소서! ”
임금이 추국을 하는 도승지에게 말했다
"형을 멈추게 하라. 남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졸이 곤장을 치는 것을 멈추자, 남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감고 잠시 거친 호흡을 골랐다. 이윽고 남이는 임금에게 말했다.
"신이 꾀한 일을 말하자면 깁니다. 원컨대 한 잔 술을 주시고 또 묶은 포승줄을 늦추어 주면 하나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남이에게 술을 내려 주고 포승줄을 늦추게 하였다. 남이는 나졸이 건네준 사발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우고 말을 꺼내었다.
"신이 과연 반역을 꾀하였습니다. 유자광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속에 억눌려왔던 말을 뱉은 남이는 대신들 속에 있는 강순을 찾았다. 남이는 시선을 피하는 강순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저이는 바로 신과 반역을 모의한 한패입니다. 지난 9월에 대행 왕께서 승하한 뒤에 마침 혜성이 나타나는 성변(星變)이 있었고 강순이 도총부에서 숙직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았더니 강순이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었는데 바야흐로 성변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때를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먼저 화(禍)를 입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응답하기를, ‘우리의 세(勢)가 약하니 먼저 선수(先手)를 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강순이 옳게 여겼습니다.”
남이는 술을 한잔 더 달라 하여 받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다른 날에 강순과 더불어 같은 날 궁궐에 숙직하였는데, 강순이 신의 숙직하는 곳에 들러 《고려사》를 보다가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세운 것에 대해 논하기를, ‘그때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후세에서는 잘했다고 하니, 지금의 형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장차 우리가 임금으로 삼을 이는 누구일까?’ 하니, 강순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보성군과 더불어 국가의 일을 논하였는데 보성군이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그 아들 춘양정이 세 번이나 우리 집에 왔다가 갔으므로 마음에 없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남이는 이어서 말하려다가 대신들 뒤에 서있는 유자광을 발견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멈추었다.
예종은 강순을 가까이 불러 물었다.
"남이의 말이 사실인가?”
"천부당만부당이옵니다.”
강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몸을 떨기만 하였다.
예종은 강순이 남이의 진술을 부인하므로 형틀에 묶어 곤장을 때리게 하였다. 강순이 다급히 소리쳤다.
"신이 어려서부터 매를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 그대로입니다.”
예종이 도승지를 시켜 강순을 문초하여 범죄사실을 낱낱이 말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강순은 남이를 돌아보며 악을 썼다.
"경망한 자야! 나를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다고 하느냐? 내가 너에게 명철한 주상전하를 힘써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이가 강순을 향해 허허롭게 웃었다. 남이는 강순을 노려보고 소리 높여 말했다.
"내가 거짓을 말했다고 하는 것이오? 대감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은 길이요. 대감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많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는 겨우 스물여덟인데 진실로 애석하오.”
남이는 강순에게서 눈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영웅이 재주를 잘못 썼구나!”
강순은 문초에 굴복하고 죄상을 털어놓았다. 강순에게 같이 공모한 자를 물으니 없다고 대답하였다. 예종이 곤장을 때려 심문하라고 명하자 강순이 황급히 말하였다.
"신(臣)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공모한 자들이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예종이 남이에게 강순과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더니 남이가 대답하였다.
"신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강순이 일찍이 말하기를, 홍윤성은 기개가 활달하여 더불어 일을 의논할 만한 자다 하고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강순이 또 말하기를, 고향인 보령에서 온 군사 가운데 당번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1백여 명인데, 만약 때에 임하여 말하면 반드시 따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종이 남이에게 난을 어떻게 일으키려고 했는지를 물으니 남이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며 순순히 대답하였다.
"창덕궁과 수강궁 두 궁은 담이 얕아서 겉으로 드러나 거사를 할 때에 바깥사람이 알기가 쉽기 때문에 성상께서 산릉에 갈 때에 사람을 시켜 두 궁에 불을 지르게 하여 성상을 경복궁으로 옮기게 하고, 12월 사이에 신이 강순과 더불어 일시에 숙직하기를 약속하여, 신은 겸사복을 거느리고, 강순은 도총부 군사를 거느리고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종은 남이로부터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들으니 분노가 치밀었다. 남이를 보고 누구랑 모의했는지 캐물었더니 남이는 공모한 자들의 이름을 대었다.
"민서, 문효량,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입니다. 모의에 참여시키려고 하다가 미처 말하지 못한 자가 이십여 인이 됩니다.”
조경치를 잡아들여 곤장 삼십여 대를 때리며 심문하였으나 조경치는 완강히 부인하였다.
다시 남이에게 물으니, 남이는 조경치가 스스로 발설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신이 만약 조경치 앞에서 말을 하고 그가 곤장을 맞아 ‘저 말이 옳다’고 하면 믿을 것이 못되고, 조경치가 스스로 말하여 신의 말과 같은 뒤에라야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추국관이 곤장을 더 때리게 하니, 조경치가 실토하였는데 그 말하는 바가 과연 남이의 말과 같았다.
남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상께서 성명(聖明)하신데 신이 복이 없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신과 강순은 모두 일등 공신이니, 원컨대 먼 곳에 유배를 보내든지 아니면 죽음을 내리소서.”
예종이 분노하여 남이에게 소리쳤다.
"네가 이렇게 될지 모르고 모반하였단 말이더냐?”
이날 보성군 이합(李㝓)과 아들 춘양정 이내(李徠)를 잡아와 임금이 물으니 보성군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지난번 강순이 노비문서의 일로 신의 집에 이르렀는데, 신이 술을 대접하였더니, 강순이 마시던 술잔을 소매에 넣고 가기에 신은 그가 자기로 만든 잔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하여 백자로 만든 술잔을 그 집에 보냈습니다. 신은 그 집에 간 적이 없고, 모의한 바도 없습니다.”
예종은 보성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자(父子)에게 술을 내린 후 석방하였다.
예종은 주모자인 남이와 강순의 자백과 남이 측근의 실토로 모든 역모 사실이 드러난 후, 백관을 불러 명하였다.
"간신들이 과인이 새로이 임금이 된 때를 틈타서 뜻밖에 상중(喪中)에 흉한 꾀를 꾸며,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난(亂)이 거의 일어나게 되었는데, 하늘과 조종(祖宗)의 도우심에 힘입어 역모가 실패하였다. 강순·남이·문효량·조경치·변영수·변자의·고복로·오치권·박자하를 저잣거리에서 환열(轘裂)하고 7일 동안 효수하게 하라.”
환열은 거열(車裂)이라고도 하며,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서 끌어당겨서 인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었다. 효수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것을 말했다.
남이와 강순 등은 군기감(軍器監,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 앞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한 후 이들의 머리가 7일 동안 효수되었다.
김종직이 이조에서 퇴청하여 육조거리를 지나 숭례문 쪽으로 나서니 군기감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갓을 쓴 유생들과 초립 모자를 쓴 백성들이 장대에 매달린 남이의 머리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남이장군은 역적 이시애를 토벌하였고, 여진족을 물리친 조선 최고의 호걸이 아닌가. 명문가 출신에다 전쟁 영웅으로 나이도 젊어 앞길이 구만리인데, 뭐가 답답해서 역모를 했겠어? 이건 틀림없이 무고야.”
"노비의 자식인 유자광이란 놈이 자신이 모시던 남이장군을 언감생심 시기하여 저 지경이 된 것이지. 역시 출신은 못 속이는 법이야.”
"상놈이 더러운 입으로 나라의 영웅호걸을 능멸하고 절단을 내다니, 말세로군 말세야.”
사람들의 탄식 어린 말들에 귀를 기울이던 김종직도 길게 한 숨을 쉬었다. 백성들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환호했던 남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죽음이 천출인 유자광의 고변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담아 야사(野史)는 남이가 유자광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도 남이를 죄가 없는 데 억울하게 죽은 비극적 영웅으로 여겼고, 조선의 무속인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으로 단종과 함께 남이장군을 신으로 모셨다.
하지만 남이의 죽음은 무고나 모함이 아닌 실패한 역모에 의한 것임을 사실(史實)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유자광을 증오한 사림이 지배한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남이의 복권을 요청한 움직임도 없었다. 남이의 복권은 순조 18년, 죽은 지 350년 만에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비로소 이루어졌다.
역사 학술논문에서도 유자광에 대해서 서술할 때 남이를 거짓으로 고변하여 억울하게 죽게 한 사람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은 물론 역사학자들에게까지 남이의 역모 사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