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서자, 얼자 따지지 말고 유자광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하네
예종은 유자광에게 사직을 구한 공을 최대한의 찬사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경은 태산과 같이 기운이 장하고 문(文)과 무(武)의 재주를 겸비하여 세조께서 경을 두고 절세의 재주를 만났다고 기뻐하셨다. 경의 형 유자환이 이미 선왕을 도와서 정난(靖難)의 공을 이루었고, 경이 이제 또 과인을 도와서 익대(翊戴)의 공을 세웠도다. 우리 부자가 대를 이어 경의 형제에 의지하였으니, 막대한 공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누각과 비를 세워 경의 공을 기록하며, 장자(長子)는 세습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 인사 기록철)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일등 공신 유자광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대대손손 사면을 받도록 하리라.”
정난(靖難)의 공(功)은 수양 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중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로를 말하며, 익대(翊戴)의 공은 남이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를 말했다.
예종은 유자광에게 구사(丘史) 7명과 반인(伴人) 10명, 노비 20명과, 밭 2 백결, 은 50냥과 말 1 필을 하사하였다. 구사(丘史)는 가마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일종의 수행원으로 나라에 소속된 공노비였다. 반인(伴人)은 종친이나 공신, 대신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을 보호하던 호위 군사였다. 유자광에게 내려준 호위군사 열 명 중에 박성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박성간은 훗날 유자광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고초를 겪게 만들었다.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를 사전에 와해시켜 사직을 구한 공로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유자광의 부인 박씨도 숙부인(淑夫人)에서 정부인(貞夫人)으로 승급하였고, 유자광의 공로로 어미 최씨도 정부인이 되었다. 유규가 부인 송씨를 잃고 얻은 두 번째 정실부인인 박씨는 유자광의 어미인 최씨에게 정부인이 된 것을 축하하며 비단 옷감을 보냈다.
예종은 유자광의 장인에게 세습적인 향리직의 의무와 부담인 향역을 면하게 하였고, 유자광의 아버지 유규에게 정 3품 중추부 첨지사의 벼슬을 내리고, 곧이어 정 2품 지중추부사로 올렸다. 유규는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자 임금에게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유규는 남원으로 낙향하면서 유자광에게 기대와 함께 당부를 하였다.
"아들아, 나와 자환이도 이루지 못한 육판서와 삼정승의 꿈을 네가 이루어 낼 것 같구나. 명심할 것은 항상 겸손하여, 특히 아랫사람에게 덕으로 대하여야 하며, 항시 감정을 다스려서 화를 참고 성내기를 더디게 해야 한다.”
유자광은 아버지가 형도 못 이룬 것을 자신에게 기대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참판을 거쳐 반드시 병조판서에 올라, 소자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전라도 남원의 백성들은 모이면 서로 말하였다.
"유자광이 나라의 공을 세워 아버지까지 벼슬을 높였으니, 하늘이 내린 효자가 아닌가.”
"아전의 딸인 부인은 물론 노비 출신인 어미까지 정 2품 정부인으로 오르게 했으니 효자도 그런 효자가 어디 있겠나.”
"아들을 낳으려면, 적자, 서자, 얼자 따지지 말고 유자광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하네.”
유규의 정실부인인 박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 자석(子晳)을 위해 자광의 생모인 최씨에게 부탁했다.
"자석이 이번 과거 준비를 위해 한양 자광의 집에서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요?”
최씨가 아들에게 박씨의 청을 전했더니 자광은 자석과 함께 자신과 같은 어미에게서 난 동생인 자형(子炯)과 자정(子晶)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한양에 도착한 자형은 자광에게 물었다.
"형님은 공신이 되었고, 어머니는 이제 정부인이 되었는데 나와 자정이도 허통이 되어 과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네 말이 옳다. 너의 공부도 상당하니 자정이와 함께 이번 과거를 준비하도록 해라.”
자형과 자정은 자석(子晳)과 함께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였다.
예문관 관리는 두 사람을 서얼이라고 망신만 주고 응시원서 접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자광이 괘씸하게 여겨, 바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저의 두 동생이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소과에 응시하였는데 얼자라 하여 예문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저의 어미가 전하의 은혜로 이미 정부인이 되었는데 어찌 이런 황망한 일이 있겠습니까?”
예종은 유자광의 말을 듣고 도승지에 명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도승지 권감이 과거를 주관하는 예문관의 담당 관리를 승정원에 불러 따져 물었다.
"유자형 형제의 어미가 이미 정부인에 봉해졌으니, 그 아들이 과거를 보는 것이 어찌 불가한 것이 되겠는가?”
예문관 대교 양수사(楊守泗)가 대답하였다.
"유자형 형제는 첩의 아들인데, 그들을 낳았을 때에 어미가 정부인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비록 유자광으로 인하여 정부인이 되었으나, 유자형 형제가 어찌 그 덕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도승지가 노하여 꾸짖었으나 양수사는 꿋꿋하게 원칙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동부승지 정효상이 중재에 나섰다.
"양수사의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 같으니 예조로 하여금 이 일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를 주관하는 예조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유자광의 어미는 자형 형제를 낳을 당시에 첩입니다. 지금 유자광이 공훈이 있는 까닭으로 특별히 어미를 정부인으로 봉한 것인데, 유자형 형제는 그전에 낳았으니, 당연히 소과에 응시할 수 없습니다.”
"도승지가 나서고 주상께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조는 논의된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예조의 보고를 듣고 대신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으니, 홍윤성이 아뢰었다.
"이제 유자광의 어미는 천민이 아니고, 유자광이 큰 공이 있어 그 어미를 정부인에 봉하였으니, 그 아들들을 허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승지도 홍윤성의 의견을 지지했다.
"유자광의 어미가 당시 본부인이 아니었다는 예조의 의견이 옳습니다. 하지만 유자광이 일찍이 병조정랑에 제수되었고,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또 참지에 제수되었습니다. 더구나 유자광은 사직을 구한 공신입니다. 그 아우는 비록 허통할 수 없다 하더라도 성상의 특별한 명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예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하였다.
"유자광의 동생들이 소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통하라!”
유자광의 두 얼자 동생이 결국 허통이 되어 소과에 응시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사관은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자광은 본래 호남(好男)으로 지위가 1품에 이르렀으나, 경박하고 광망(狂妄)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사관은 유자광을 본래 '호걸의 풍모가 있고 기품이 있는' 호남(好男)이라고 하면서도, 예전과 같이 경박하고 망령되다고 평가하였다. 사관은 얼자 동생들의 관직 진출을 위해 공을 믿고 임금까지 움직이며 가볍게 처신하는 유자광이, 미천한 출신답게 ‘경박하고 함부로 행동한다’는 불편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