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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Dec 20. 2024

빛보다 먼저 도착하고 싶었다

미니픽션 & 콜라주

※ 콜라주 재료
→ [삼행시]빛보다 더 빨리, 당신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 [삼행시]밤하늘은 밤바다로 젖어들고 당신은 그 앞에 앉아
→ [삼행시]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품이 났지만 눈은 감기지 않았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늘 그랬다. 


뒤척이고, 뒤집고, 마른침을 삼킨다. 


혹여 은은한 노래라도 들으면 잠이 올까 싶어 이어폰을 꽂기도 했다. 

어김없이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말았다. 그가 좋아하던 노래.


그는 말했다.

"빛보다 빠르게 가고 싶다.“

죽기 전에, 그는 자주 라디오를 들었다. 

"너무 먼 곳의 이야기라도 좋으니, 따뜻한 소식을 나한테도 좀 들려줘"라며 웃었다. 


죽은 별빛도 지구에 닿으려면 수천 년이 걸리는데, 

그가 남긴 말은 왜 이리 빠르게 되돌아와 울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온성과 니느웨를 말하던 그 목소리, 

오래된 주파수를 타고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가 녹음해두었던 테이프에서 당첨된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빛보다 빠르게, 당신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라디오의 목소리는 늘 울림이 있었다. 그런 직업인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어디로 향해야, 그렇게 빠르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혹여 방향을 잘못 잡아 영영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유튜브를 켠다. 

자극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귀를 잡아끄는 

크리에이터의 목소리. 입시를 위해 전전긍긍하며 새벽부터 수업을 듣고자 했던

일타강사의 목소리를 닮았다.


로데오거리의 밤. 

비틀거리는 사람들, 

익숙한 소음, 

하찮은 다툼. 


화면 속 그 풍경은 그가 혐오하던 세상이었고, 

그가 바꾸고 싶다던 세상이었다.

"결국에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가 쓴 글에 남겨진 한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마치 어떤 비밀이 누설된 오염된 체념처럼 놓여 있었다.


숨긴 말은 어디선가 새어나갔다. 

그것이 정녕 비밀이었다면, 비밀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좋아하던 책, 

그가 읊던 애도의 주문 같은 것, 

그 행들이 입안에서 말라붙는다. 

숨겨진 무엇이 터져 나와 나를 찌르는 것 같다. 


그가 죽고, 

그를 애도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의 덫에 걸려서는 기어이 세상을 떠났다. 

떠나지 않는 것이 죄스럽다 여기며, 홀연히 떠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증언하는 유품들엔 여전히 생을 이어가는 자연스러운 흔적, 

너무도 당연하게 내일을 기대하는 숨소리가 남아 있었다. 

죽은 자의 것이어서 그러한 모호한 말줄임표 같은 흔적은 허공에 남아버린 헛된 반복이라고 해야겠지만,

남은 자들의 훌쩍이는 소리와 뒤섞이며, 낡아버린 슬픔을 집요하게 닦아내고 있었다. 

산 자들은 그저 그런 습관처럼 생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으로, 그들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를 비웃었다. 

그의 믿음, 

그의 고집, 

그의 목소리. 

그게 다 뭐라고 그렇게까지 싸웠을까. 


물론 그를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는 위악일 뿐이었다.

위악은 좋지 않았다. 

위악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위악은 정말로 모든 것을 건조하고 버석대는 가루를 

풀풀 날리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를 

그리워한다.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사무치게 그립고, 그는 빛보다 빠르게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뒤척이며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그 테이프를 들었던 날이 있었다. 변함없이 나이 들지 않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는 시공을 넘어 내게 와닿았다.

"빛은 오래전에 죽은 별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 날아가고 있습니다. 원래 가닿아야 할 그곳, 아니, 어쩌면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먼 곳으로요."


나는 침대 끝에 앉아 그가 남긴 단어들을 중얼거린다. 

죽은 별빛, 

오래된 라디오, 

시온성과 니느웨. 


그가 언젠가 말한 대로, 빛보다 빠르게 가닿고 싶다. 그리고 나중에 그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늦어서 미안해. 그래도 왔으니까, 이만하면 빠른 거지?"

그가 나를 기다릴까? 아니면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을까. 

알 수 없을 일이다. 


이 밤에도 나는 그가 언젠가 흥얼거렸을지도 모를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나의 목소리는 오래 전 라디오의 선곡으로 흘러나왔을 노래의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그의 목소리는 시공을 가로질러 겹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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