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Part2 (80~86F)
글쓰기 외전: 스타일 Part2
◑ 전체 원고 콘셉트 및 진도 상황
- 매거진 방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다양한 저자를 섭외하지는 않고 단독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매거진에서 다양한 글에 다양한 필자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다중 정체성의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고흐 이미지를 배치하고 여러 스타일의 글과 함께 구성하였습니다. 픽션 매거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매거진 놀이로도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원고의 경우 전체 흐름에선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하되 종종 일관된 방향성을 띠되 원활한 개진을 위하여 허구적 설정을 삽입하였습니다. 대체로 경험적 정보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 총 127프레임으로, 상황에 따라 약간 바뀔 수 있습니다. 현 발행글은 80~86프레임에 해당합니다.
♬ 다큐멘터리 인터뷰 동영상 미편집본: 번호글 독립성 확보로 생긴 문제, 삼행시
“낭독극 대본의 구어체적 설정, 지식놀이적 속성이 번호글로 유입된 셈이에요. 인물 간의 상호 반응하는 대화를 없애고 가급적 인물 각자의 의견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은 약간 달라졌지만요. 이때 그것을 중재하는 객관적이고자 하는 조율자가 필요했어요.”
“둘이 통화하는 형식으로 할지, 인터뷰 방식으로 할지 등등요. 확장성을 고려할 때 낭독극 형식이나 방송토론 패널 형식 등등도 고려하였는데, 메인 양식으론 다큐멘터리 인터뷰 형식이 가장 나아 보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다큐멘터리 인터뷰 동영상 미편집본이겠죠. 감독을 전면에 등장시키지 않고, 질문도 소거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기반으로 말하죠. 또 때로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다른 인터뷰이의 영상을 보고 말하는 반응에서는 직접적인 상호 반응은 아니지만, 의견이 연결되는 거고요. 그러면서 인물 각자에게 집중하면서 어떻게 의견이 변하고 조합되는지를 보여주죠. 이 중심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있었어요. 다큐멘터리 장르 자체에 제가 취할 만한 요소는 모두 담겨 있었던 거죠. 그러고 보니 탐정 소설에서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듯, 다큐 감독이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고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화면에 담아내는 다큐 장르에 관심이 생겼죠. 다큐 감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수시로 등장하면서 인터뷰이와 의견을 교감하는 장면을 집어넣고 싶기도 했죠.”
“탐정 소설 대신 다큐 감독이 중심축인 장르 구상, 구어체 설정은 외적 스타일이면서, 어디든 적용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내적 스타일이기도 했어요. 그 설정 자체로 창작에서 특정한 효과를 내는 기법적 요소가 있기도 하고요. 여기에 지식놀이라는 내적 스타일이 더해지면서 번호글만의 특성이 선명하게 생겼다고 해야 할 거예요. 번호글은 여러 형식이나 기법을 적용할 수 있는데, 스테레오타입을 고민하다 보니, 뜻밖에 낭독극적인 요소를 대체로 수용하고 다큐멘터리의 요소까지 접목하면서 번호글만의 개성적 스타일이 나왔다고도 할 수 있죠.
이처럼 번호글만의 개성을 찾으려다 보니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어요. 원래는 임의적으로 가독성을 높이려는 의도로 번호를 붙였고, 그건 단지 삼행시를 설명하려고 했거나 삼행시와 호응하는 과정의 결과물이었죠. 그런데 콜라주 기법 자체가 아니어도 번호글 안의 문법이 구체적으로 도출되면서, 갑자기 삼행시를 떼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든 것이죠. 삼행시 콜라주에서, 특히 톱다운 방식에서 삼행시는 어딘가 모르게 작품 안으로 녹아든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까요. 각각을 읽을 때는 삼행시가 다양한 방향으로 야생마처럼 날뛰는 면도 생겼죠. 그게 콜라주의 맛이라지만, 너무 과하면 독자들은 갈피를 못 잡게 되니까요. 그런 상태를 즐기라고 하자니,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죠.
그래서 삼행시 콜라주가 어렵게 도출한 통합된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여겼다가, 점점 물음표가 생겼죠. 어떤 형식이 너무 도드라지게 형식성만 강조하다 보면, 그것에 합의하지 못하여 낯설게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고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차라리 삼행시를 모음집 형태로 놓아둔다면, 시집을 읽는 것처럼 가볍게 각자의 작품에 접근할 텐데 말이죠. 번호글로 이야기가 제시되고 나니, 그 모든 것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그럼에도 삼행시 콜라주의 매력에 빠져 있을 때는 우선 그러한 단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죠. 그러는 과정에서 번호글을 삼행시편과 대비되어 호응하려고 구어체를 택했고, 삼행시편을 줄여서 가독성을 방해하는 정도를 낮추려고 했죠. 그도 아니면 삼행시편 사이로 산문이나 콩트 등을 배치해서 좀 더 명료하게 관계 설정을 해주어서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는 방안도 검토했던 거고요. 그러면서도 번호글의 스타일을 확립하려는 노력도 병행한 거죠.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확립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갑자기 굳이 삼행시가 있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걸 떼어버리면 개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했던 게 다 물거품이 될 것 같아서 계속 꺼렸지만, 가독성 측면에서 삼행시 콜라주라는 형식의 한계가 어느 정도 보였죠. 또 쉽게 분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는 뒤집어 보면 ‘방만하다’는 의미였어요. 특히 톱다운에서는 콜라주의 기능마저 퇴화된 기분이 들어서, 망설이다가, 결국엔 삼행시를 떼는 시도를 시작했어요. 하나의 스타일로 삼행시 콜라주를 염두에 두었는데, 다시금 새로운 탐색을 시작했죠. ‘과정과 놀이’의 미덕을 유지하면서도 고질적인 문제 지점인 저작권 침해 우려 등을 단번에 해결한 형식이라고 여겼는데, 불완전한 면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 결심을 하자, 톱다운으로 작업한 원고부터 전환해볼까 하다가, 역시나 통합적인 하나의 스타일을 위해 바텀업 원고까지도 전환 시도를 염두에 두었어요. 놀이글이 다시 호출된 것이죠. 삼행시 콜라주가 정답이라 여겼을 때는 잠시 놀이글도 서랍에 들어갔던 적이 있죠. 핵심 중의 핵심 형식이었지만, 여러 난제로 잠시 주춤하면서 ‘출판용으로는 적당하지 않고 그냥 블로그에서 연예인 팬질용으로 쓰자’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죠. 그래도 출판하고 싶다면 모든 형식을 삼행시 콜라주로 전환하는 단계적 마감을 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환호했을 때도 있었죠. (웃음)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꾸라진 거고요. 시행착오가 참으로 많았죠. 일단 생각나면 시도해 보고, 시도하면서 일일이 많은 지점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 몰랐던 문제를 알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결 방안도 생각한 거고요. 몸으로 부딪힌 셈이죠.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 부딪혀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요. (웃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어떤 때는 하나의 스타일로 통합해서 내 작업을 그냥 예시로 들어서 모든 근간을 담아 내자는 쪽이었어요. 그러다가 또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발견하고 고안했던 여러 성과물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자는 쪽이기도 했어요.
일단 출판을 염두에 두었을 때부터는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를 보이려면, 단 하나의 형식으로 그동안의 시도를 압축하는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다른 시도들은 미발표 형태든, 1단계 창작으로 인식의 마중물 역할을 하든, 공적 무대 뒤편으로 묻어 두어야 한다고 보았죠. 삼행시 콜라주로 통합하려던 시점에는 바로 이러한 ‘단 하나의 스타일’을 고민했죠. 그리고 삼행시 콜라주도 유보하자는 결심이 섰을 때도 놀이글을 통합 스타일의 후보로 중심에 올린 것이고요.”
“사실 여담이지만, 삼행시 콜라주를 하기 전부터 놀이글을 단 하나의 통합 스타일로 고려했었죠. 삼행시를 배제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아서, 삼행시는 그냥 취미용으로나 활용하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놀이글을 점검하려다 보니,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제한된 규칙으로 고흐의 명화를 선정하여 인용하는 방식을 선택했죠. 외적으로 고흐의 명화라는 소재가 확연히 드러나니 외적 스타일이자 형식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어쨌든 한동안 분량이 찰 때까지 고흐 명화로만 이미지를 인용해서 놀이글 작업을 했죠. 그리고 그것을 모아서 <황반변성의 별빛>이라는 모음집을 만들었는데, 투고를 위해서는 블로그의 스크롤 형식을 적용하기 어려웠죠. 물론 워드 파일로 블로그의 스크롤 형식처럼 상하로 이동하면서 읽는 것을 핵심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예뻐 보이지 않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스크롤 형식보다는 프레임 형식을 선호했어요. 가로본에서 2단으로 구성해서 글과 그림을 적절히 배치하고 말풍선을 달기도 했더니, 만족스러웠죠. 그게 2쪽이 될 수도 있고, 1쪽으로 처리할 수도 있어서 ‘프레임’으로 칭했고요. 또 2단의 경계에서 말풍선으로 글밥을 놓기도 하니, 프레임으로 보는 편이 적절했죠.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면서 투고용 놀이글 편집을 했는데, 당시에는 그림이 글의 분량과 무게를 압도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고민에 빠졌죠. 그렇다고 글을 새롭게 늘리거나 그림을 빼거나 할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일단 게을렀고, 무엇보다 그림보다 해설이 많게 하자니 놀이글에 기대할 재기 넘치는 역동성이 줄었고, 그냥 산문처럼 되었어요. 그럴 바에는 그림이 필요할까 싶었죠. 그렇다고 그림을 빼면 놀이글의 정체성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었고요.
그래서 삼행시를 중용하고 삼행시 콜라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 놀이글은 잠시 서랍에 묻어두었어요. 예전처럼 연예인 팬질글로서 놀이글조차 간헐적으로 작업했을 정도로 놀이글에 대한 관심이 식었죠. 그때는 정말 아쉬웠어요. 그동안 노력했던 시간의 많은 부분이 증발해버린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놀이글을 다시 호출하게 된 것이죠. 예상치 못하던 순간에요. 삼행시 콜라주의 번호글이 정립되는 바람에 삼행시편이 거추장스러워진 순간이기도 했으니, 조금 어처구니 없기도 했죠. 흥할 것 같더니 뒤로 물러나고, 망한 줄 알았던 것이 되살아났죠. 놀이글의 재등판이었어요.”
“사실 그냥 번호글로만 남기는 방안도 논리적으로는 검토해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어색했어요. 그래서 번호글로만 남기려는 시도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동안 콜라주든 이미지 조합이든 ‘이질적 요소의 결합으로’ 개성을 찾으려던 버릇 때문이었을까요? 번호글로만 남기려는 뭔가 모자라 보였어요. 무엇보다 번호로 뚝, 뚝 끊은 파편적인 내용을 그냥 방치하듯이 전시하는 것으로는 모자랐는데, 그렇게 되면, 그냥 전체를 단일하게 잇는 산문을 고려해야 했어요. 또 각 인물의 의견을 가상으로 조합하여 토론하는 교양서를 의도할 순 있었죠. 그것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인터뷰로요. 당시로써는 그게 어쩐지 조금은 불충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해야죠. 발화자의 신뢰도로도 싸워야 하는데, 형식 역시 호흡이 수시로 단절되는 느낌을 주는 듯했으니까요. 이것은 삼행시를 콜라주 재료로 전시했을 때도 생각했던 문제였기에, 번호글을 붙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전환하여 예전 형식부터 살펴본 것이죠. 그러고 보니 놀이글만 한 스타일이 없었죠. 그렇게 잠시 서랍에 들어가 봉인될 뻔했던 놀이글이 그리 오래지 않아 살아 돌아왔죠. 너무도 저의 맥락을 잘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어요. 이별한 줄 알았던 옛 동료와 재회한 기분이 들었죠. (웃음)
실행에 옮겼어요. 우선 바텀업으로 작업한 원고부터 놀이글 프레임 형식으로 전환해 보았죠. 그러다가 생각보다 더 예쁘게 도출되는 듯해서, 본격적으로 톱다운 방식 역시 놀이글 프레임에 얹어서 다시금 퇴고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톱다운 방식으로 삼행시를 뽑아내는 것이 영 장식적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어서 이런저런 고민을 했고 번호글 자체의 스테레오타입이 상세해지면서, 삼행시를 떼고 번호글을 다른 각도에서 활용해보기로 한 것인데, 정작 먼저 시도한 것은 바텀업으로 뽑아낸 소설적 이야기였어요. 그걸 그림책을 참고하면서 프레임을 짜는 것까지 직접 해보았죠. 예전에는 이미지에서 긴밀하게 해설이 뽑혀서 방향성을 설정하고 이미지 간의 결이 안 맞는 것을 마름질해준다고 여겼는데, 그렇게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그것의 역동적 우연성을 보여주기 위해 길 정도만 만들어주는 게 글이었는데, 이제는 글 분량을 충분히 잡고 글 자체를 삼행시 콜라주로 뽑아낸 상태였죠. 번호글 형태로요. 그리고 그 인물들을 고흐의 명화 이미지로 배치하고, 부가적인 풍경 역시 배치하고 해설을 붙여 그 첨부 이유를 넌지시 알려주게 된 거죠. 번호글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니 예전과 달리 거부감 없었죠. 이야기는 진지해졌고, 호흡도 길어졌죠.”
“단 하나의 스타일로 통합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탈락하는 요소들이 생기죠. 삼행시를 비롯해 채택되지 못한 놀이글 등이 그랬어요. 이들 모두 놀이글 프레임에 얹힌 원고의 땔감처럼 활용되는 것으로 그 용도를 잡았죠. 실제로 그냥 방치되는 경우도 많겠지만, 원칙적으로 블로그에서 쓸 만한 땔감을 모으는 작업을 계속 하려고 하고요. 거기서 바텀업으로 글감을 추출할 텐데, 인용 전시할 필요가 없으니 꼭 삼행시로 통일할 필요 없이, 쓸 만한 지점이라면 모두 인용되어 콜라주 재료로 쓰일 수 있었죠. 이것을 ‘인식의 마중물’이라고 불러요. 지하수를 끌어내기 위한 펌프질 때 첫 번째로 집어넣는 마중물 같다는 의미죠. 아무 생각이 나지 않다가도 이것저것 조합하여 읽다 보면 뜻밖에 관통한 통로로 이야기가 흘러나와 시작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제 삼행시나 놀이글이나 일기 등등 모든 글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었어요. 그 방향이 정해질수록 관련성 있는 또 다른 땔감으로 콜라주 재료를 모으는 거죠. 원고에서는 숨은 주석이 되는 것이겠고요. 콜라주 기법을 여전히 쓰지만, 가시적으로 전면화하지 않는 거고요. 말 그대로 과정으로 남는 거죠. 단계적 마감으로 체계화된 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