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삼촌 → 촌락 → 락커 → 커서 → 서산 → 산삼 → 삼촌
산삼이라는 단어는 참 묘한 위치에 있다. 일상 대화 속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잊힌 단어도 아니다. 산삼은 우리에게 그저 희귀한 약초를 넘어선 어떤 꿈과 희망 같은 존재다. 산삼을 실제로 캔 적이 없더라도, 그 값어치와 소중함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마치 1등 당첨 복권처럼, 단어는 숱하게 인용되지만 실물로 보기는 어렵고, 언젠가는 꼭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이상적인 존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다가 산삼 파는 거 보면 사올게”라거나 “아줌마, 여기 깍두기랑 산삼 좀 더 주세요” 같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 절도 있게 쓰인다면 분명 재치 있는 농담이겠지만, 그조차도 시도하지 않을 만큼 낮은 확률로 일상에 등장하는 단어다. 1년 중 산삼이라는 단어를 쓰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
이처럼 이 단어를 말하는 데에는 어색함도 없고, 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단어의 사용 빈도조차 드물다. 산삼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황금의 무게를 손에 쥔 것처럼 느껴진다.
산삼은 늘 우리 주변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손에 쥐기 어려운 신비로운 단어인 셈이다. 관련자가 많은 곳에나 가서야 지겹도록 듣겠지만, 일반적인 곳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산삼 제조 공장이나 심마니의 모임에나 간다면 평생 들을 산삼이라는 단어를 한두 달 만에 다 듣게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남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단어라니, 말로만이라도 기분 좋은 단어인 셈이다. 비트코인이나 주식 대박도 그러하겠지만, 어쩐지 자본주의 속물 같다는 혐의를 씌울 수 있는데, 산삼은 그마저도 비껴간다. 무슨 도인의 식도락과 판타지 속에 머물렀는데도,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켜준다.
이를테면 산삼은 한도치가 없는 단어계의 블랙카드인 셈이다. 지나치게 되면 그 단어의 희귀성도 없어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산삼은 일상 속에서는 마치 준비된 비장의 카드처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산삼을 본 적은 없어도 산삼의 가치를 말로 과장하고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재미있다. 마치 조선시대 집단무의식이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처럼, 먼 훗날에는, 비트코인과 주식 대박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될까? 자연에서 산삼은 사라지지 않지만, 비트코인과 주식은 그때도 있어야만 가능하겠지만.
산삼은 이렇듯 ‘없어서 잊은 단어’가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든 활용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오래도록 본 적은 없는 실체에 관한 단어라는 특징이 있다. 기껏해야 미디어에서 본 게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름다운 연예인과도 같다. 마르고 닳도록 미남 미녀를 불러대지만, 그들에게 가닿은 적이 있던가. 산삼 같은 존재들인 셈이다.
어쩌면 산삼이 가지는 매력은 그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가치를 품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사용 빈도가 낮아서 그 가치가 퇴색되지 않기 때문에, 산삼이 단순히 약초 이상의 단어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 언제든 쓸 수 있는 공기 같은 단어, 그러면서도 그 소중함이 퇴색하지 않는 연예인 사진처럼 준비된 단어라는 점에서 희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