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았을 때 립스틱 두 개를 차례로 같은 방식으로 잃어버렸다. 나는 호주머니에 립스틱을 넣고 다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드러눕기를 좋아하는데, 오렌지 레드의 입생로랑 립스틱은 소모임방 소파에서 자고 난 후 없어졌고, 베이지 브라운의 에스쁘아 립스틱은 여성 휴게실 바닥 위에서 잃어버렸다.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헐레벌떡 일어나 사무실로 돌아갔다가 립스틱을 찾으러 갔지만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 나는 안일한 버릇 때문에 물건을 두 개나 잃어버렸다고 자책하다 그냥 잊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전, 이제 겨울인가 싶어졌을 때 어떤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점심시간에 간 소모임방 소파 위엔 나를 맞이하듯 입생로랑 립스틱이 놓여 있었다. 새벽 강습 때 쓴 수영복을 널어 놓으려고 간 여성 휴게실에서는 또 귀신같이 돌아온 에스쁘아 립스틱을 찾았다. 한 주 안에 일어난 두 번의 신비에 크게 놀란 나는 다른 이용자들이 각각 립스틱을 찾아주었고 우연히 시기가 겹쳤다고 추측했다. 이 정도 쯤에서 의미부여는 끝내려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체육대회가 있었다. 김치전을 부치고 줄다리기를 하는 등 소란스러운 몸풀기가 모두 끝난 후에야 경품 추첨이 시작됐다. 종교단체에서 기부한 에어팟 프로가 1등상이었고, 3등이 에어프라이어에 2등이 고급 여행 가방 세트여서 다들 관심이 대단했다. 긴장이 흐르고 3등 45번이 불리자 맞은 편 멀리 누군가가 날듯이 단상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헤어진 전남자친구였다. 잔디밭을 한바퀴 돌아 같잖은 세리머니까지 했다. 꼴보기 싫어 미치겠다는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2등 89번이 불렸다. 내 번호였다.
보란듯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전남자친구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2등에 당첨된 일, 그리고 우연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비슷한 시기에 립스틱 두 개가 모두 돌아온 것. 이 두 가지 사건이 한 달 안에 일어났다는 것이 마치 계시 같았다. 되찾을 수 없다고 믿었던 립스틱이 돌아온 것은 어쩌면, 전남자친구가 나에게서 앗아갔던 무언가를 다시 돌려주겠다는 신의 메시지 아닐지. 그렇다면 그는 석사도 못 딸 것이고 승진도 못할 것이며 나는 동료들의 사랑을 받으며 올해를 훌륭하게 마무리하지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장면이 직접 본 것처럼 스쳐지나갔다.
몇 년 전 나는 타로카드에 빠졌다. 그때도 남자가 문제였다. 내 속을 다 읽은 듯 휘두르면서도 자기 마음은 들키지 않는 그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카드에 집착했다. 왕이나 기사 등 인물 카드는 그로 해석했고 심판은 재회할 날을, 별은 막연한 희망으로 읽었다. 좋게 해석할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카드를 다시 펼쳤다. 그와 연락을 하는 날에는 몇 시간 마다 점을 보는 내가 조금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실낱 같은 단서들로 사랑의 증거를 만들어내는 일, 그건 결국 이야기 만들기였다. 내 삶이 잘 짜여진 이야기일거라는 생각, 그래서 그와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이 그때의 나를 지탱했다.
글쓰기는 그때에도 지금도 내게 가장 중요한 무엇이다. 사건들과 생각을 엮는다. 빠져나갈 틈 없이 단단하게도 혹은 바람이 통할 만큼 느슨하게도 짜본다. 완성품이 그럴듯해 보이면 여전히 기쁘지만 몇 년 전 그 시절처럼 나를 흥분시키지는 못한다. 그때의 고통도 흥분도 대부분의 감흥이 그러하듯 시간과 함께 둔해졌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 어떻게 그렇게 예리하던 고통도 사랑도 모두 사그라들고 타인의 감정처럼 반추할 수 있게 되었을까. 시간은 모든 것을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반복해서 카드 점을 보고, 이야기를 만들며 해피 엔딩 뿐 아니라 새드 엔딩도 수없이 시험해보았다. 그건 가상의 슬픔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다. 그 지겨운 반복이 시간을 더 빠르게 흐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우연하게도 그가 내 친구의 지인과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조금 울었지만 그때도 이미 사랑 때문에 슬펐던 건 아니었다.
잔디밭을 걸으며, 주인공이 된 기분에 한껏 취해 전남자친구에게 욕설을 하는 상상을 했다. 보란듯이 째려보고 걷는 상상을.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립스틱과 체육대회, 그리고 나와 전남자친구의 과거는 내가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와의 관계가 그토록 고통스러웠기에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알고 있다. 그와의 관계에 있었던 모든 불길한 단서들을 조합하는 동안 어떤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나는 나아졌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건 삶의 동의어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