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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Aug 27. 2023

단편소설 민물장어

(3)

물맛이 밍밍하게 바뀌었다. 더 밍밍한 곳으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낮은 더 더워졌고 밤은 더 시원해졌다. 물살도 더 거세졌고 빛도 여간 센 게 아니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다 보니 등짝이 아주 따가워 나 다닐 수가 없었다. 피부와 모습도 달라졌다. 처음엔 안개마냥 뿌옇게 보이더니 이젠 완전히 잿빛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몸이 투명하지 못해서 들키지 않기 위해선 잘 숨어 다녀야 했지만 주로 바닥으로 다니게 되니 잿빛이 눈에 띄진 않는다.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게 좀 마음에 든다.


최근엔 정말 엄청난 것을 알아냈다. 세상이 2개라는 것이다.

몸이 커지고 나서 아가미란 것이 생겼는데 숨을 잘 쉬기 위해선 볼따귀를 잘 움직여 줘야 한다. 아가리를 열고 물을 쭈욱 빨아들인 뒤에 아가미로 후우 뱉어내면 숨이 쉬어진다. 아무튼 아가미를 열심히 놀려도 바닥에서는 숨이 찰 때가 있어 숨기가 좀 더 수한 윗동네로 가끔 올라가 보곤 했다.

그때 보았다. 내가 사는 세상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잘 보이 않지만 우리 세상만큼 넓은 세상임을. 그 세상에서 사는 녀석들이 가끔 우리 세상에 들어온다. 달빛이나 햇빛도 모두 그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었다. 색도 아주 희양 찬란하다. 푸른색. 녹색. 붉은색이 아주 눈이 부시게 쏘아져 내린다. 자세히 쳐다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


다시 밍밍한 물맛을 가진 이 동네를 말하자면 태어난 곳과 그동안 지나온 곳들에 비해 안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처럼 고만고만 녀석들이 많지 크고 무서운 녀석들은 더 많아 보이진 않는다. 숨을 곳도 더 많아졌다. 처음엔 좀 불편했지만 큼지막한 돌틈사이 공간을 만들고 내 집이라 생각하니 편해졌다.  

 

적당히 숨어서는 먹고자며 편하게 몸을 키워 냈다. 해가 넘어갈 때즈음 굴을 기어 나와 주변을 돌아다녔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상당히 많았다. 주변은 투명한 동네와 뿌연 동네로 나뉜다. 내 집은 투명한 동네 주변에 있었고 돌과 바위가 많았다. 뿌연 동네는 주로 모래와 풀이 많아서 먹을 것들이 더 많았다. 가끔 투명한 동네와 뿌연 동네 할 것 없이 홀라당 흙탕물로 바뀔 때가 있는데 그땐 온도가 더 시원해진다. 

돌팍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나 말고도 굴속에 집을 짓고 사는 녀석들이 있었다. 언듯 보기엔 다 비슷하지만 다들 자기 집은 어찌나 잘 찾는지 돌틈마다 집주인이 각기 다르다. 그날도 든든히 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굴 앞에 도착해서 대가리를 돌려 꼬리부터 굴속으로 집어넣는데 나의 얇디얇은 꼬리가 턱 하니 막혀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내 굴이 맞는가 다시 한번 쳐다봤다. '분명 내 굴이 맞는데...' '마실 다녀온 사이 굴이 무너진 건가?' 생각하고는 대가리부터 쓱 디밀어었는데... 아뿔싸!

거대한 그 눈과 내 좁쌀만 한 눈이 마주쳤다. 아가리는 또 얼마나 큰지 그놈 입술에 달린 수염이 내 몸과 같은 크기였다. 두꺼운 두 입술사이가 쩍 하고 벌어지더니 순식간에 몸이 빨려 들어갔다. 입술을 지나 그놈 입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둥지둥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처 봤지만 턱 하고 닫히더니 내 몸뚱어리가 꽉 끼여버렸다. 몸이 마구 떨리고 눈알도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빠져나가기 위해 미친 듯이 몸을 흔들고 비틀어댔다. 그 입에는 이빨대신 뾰족한 가시 같은 것이 돋아나있어서 내 피부는 찢겨 나갔다.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몸통 한 덩어리를 내어주더라도 살아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아니 난 발이 없어 몸부림쳤다.

또 한 번 운이 좋았다. 그놈이 날 빨아들일 때 내 침대로쓰던 나뭇가지들도 같이 빨아들였다. 그 가지가 그 입술을 꼭 다물지 못하게 도와줘서 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곳에서 온 주변 녀석들을 보면 나처럼 날렵하지 못했다일찌감치 무시무시한 녀석들이게 거의 다 잡혀갔다. 허리가 굽은 놈, 비실비실한 놈, 꼬리가 뚱뚱한 놈 모두 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그들을 잡아간 그 무시무시한 녀석들은 정말 상상하기도 실다. 땅속에서 튀어나오질 않나. 돌틈에서 튀어나와 낚아채 가질 않나. 커다란 망태기로 보쌈을 해버리는 녀석도 있다.


몸뚱이가 커지다 보니 배가 더 고파졌다. 짭짤한 맛도 없어져서 그런지 싱겁지만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너무 배가 고플 땐 이른 밤이나 새벽까지도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긴 하는데 해가 뜨고 나면 먹을게 많이 없어진다. 바닥에 가라앉은 낙엽들을 뒤지다 보면 먹을 것들이 나왔다. 주로 집게가 달리거나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것들이었고 흙바닥엔 또 다른 것들이 있었다. 그 세상에서도 먹을게 떨어지긴 하는데 맛은 좀 덜하다. 신토불이라고 우리 것이 조금 더 맛이 좋았다. 가끔씩 운이 좋아 미꾸라지나 작은 물고기들을 잡기도 했는데 그것들이 제일 맛있는 거 같다. 미꾸라지나 미꾸리 같은 녀석들은 길쭉하니 나랑 생긴 게 좀 비슷해서 여간 날랜 게 아니다. 이 녀석들이 작은 구멍에 들어가 버리면 내 몸뚱이로 바늘구멍 같은 그곳을 통과하긴 불가능하다. 그 구멍이 또 여러 군데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곳으로 금세 빠져나가버린다. 난 사냥엔 영 소질이 없다 

오히려 하루정도 숙성시켜서 먹는 걸 좋아한다. 그 세상에 녀석들이 윗동네 경계에서 투닥거리다가 이곳으로 들어오면 영 힘을 못쓰고 죽어버리는데 마실을 나가는 저녁때쯤 되면 딱 먹기 좋게 바닥에 가라앉혀진다.

무엇보다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면 냄새도 솔솔 올라오고 감칠맛이 돈다. 적당히 불어서는 씹기도 편하고 소화도 잘된다.


이젠 제법 강한 물살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몸뚱이를 이리저리 휘둘러주면 물을 비집고 앞으로 쭉쭉 나가게 된다. 먼길을 돌아가기가 귀찬아 지름길로 갔는데 우리 세상은 낮고 그 세상과 가까운곳었다. 갑자기 등뒤에서 찌르듯이 어떤 놈에게 꼬리를 물리적이 있는데 어찌나 놀랬던지 아직도 그날 생각하면 쓸게가 쪼그라들것같다. 나는 몸을 날래게 앞으로 쭉욱 내빼고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배배 꼬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꼬리 지느러미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제 그까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차하면 돌틈사이로 숨어들 수 있다. 뾰족한 돌이 있더라도 내 몸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미끈하게 통과된다. 기름은 아니고 피부도 아닌 것이 내 몸을 감싸는데 아주 부드럽다. 내 기분에 따라 그 양이 달라진다


점점 시원해지다가 세상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워낙 찬물을 좋아하는 나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몇 달째 제대로 먹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렇게 배가 고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졸음이 마구 쏟아진달까.

그렇게 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잠만 몇 달을 내리 잤다. 생각해 보니 숨도 쉬지 않고 잠만 잔듯하다. 긴 잠을 자는 동안 난 꿈을 꾸었다.

우주를 보았고 그 새까맣고도 포근한 우주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마치 내가 태어난 그곳에 돌아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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