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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Jul 28. 2024

『미들마치』를 비몽사몽 읽다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비몽사몽 읽다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세수도 안 하고 책을 읽는 건 훌륭한 독서가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데 훌륭한 독서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는 나는 그다지 가책을 느끼지 않고 눈곱 낀 눈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게다가 책 읽는 자세는 매우 충격적인데 자리에 누운 채 읽는 것이다.      


이불 위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책을 읽는다는 건, 지난밤의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읽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른바 고대에서 비밀리에 전수된 <비몽사몽 독서법>인데, 이것이 지닌 기이한 장점은 문장 해독 능력이 신통할 정도로 높아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난해하고 어려운 구절도 적당히 둘러 붙이고 꿈길을 걷는 듯 대충 해석하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특수한 독서 기술이면,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아랍어로 쓰인 책일지라도 어려울 게 1도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물론 고도의 비기를 충분히 터득한 고수의 비몽사몽 독서가가 된 이후에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독서법의 단점도 있긴 하다. 세수하고 책상에 앉아 조금 전에 읽었던 부분을 다시 들춰보면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선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꿈에서 깨는 느낌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청춘 시절의 연애 감정에서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젊음의 무지몽매에서 깨어난 진보주의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추억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가 된 듯한 기분도 든다. 결국 비몽사몽 독서법은 당신을 중도의 길로 이끌게 될지 모른다. 박쥐 취급받을 수 있기에 권장하지 않는다. 난들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닌 박쥐가 좋을 리가 없다. 그냥 슈퍼히어로 배트맨의 추종자인 나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훌륭한 독서가는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마주할 때, 정갈한 옷차림(정장)으로 곧은 자세로 등을 펴고 책상에 앉는다. 마치 옛 선비를 떠오르게 한다. 며칠 전 뒤늦게 정주행 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사극 드라마를 보는데, 옛사람들은 한결같이 훌륭하고 경건한 자세로 선인의 가르침을 읽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충격을 받았는데, 내가 얼마나 무도한 독서가인지 새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비몽사몽 독서법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그냥 습관일 뿐. 

습관을 어찌할꼬.      




요즘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고 있다. 두 권짜리 총 8부작의 긴 장편소설인데, 이제 겨우 1권을 다 읽고 2권을 읽는 중이다. 세상에는 똑똑한 소설들이 있고, 더 똑똑한 소설들이 있고, 그 위에 『미들마치』가 있다. 고전 안내서 『고전의 유혹』을 쓴 작가 잭 머니건이 한 말이다. 몇 개의 단락마다 탐조등처럼 등장하는 조지 엘리엇의 이해력이 돋보인다. 이 역시 잭 머니건의 평가다. 

    

여동생이 보내준 교보문고 기프트카드로 구매한 미들마치. 모두 2권이고 8부작이다. 미들마치는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가상의 영국 지방도시

조지 엘리엇은 본명이 메리 앤 에버스이고 1819년 영국에서 태어난 여자 사람 작가이다. 그 당시에는 여자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사방천지에 포진하고 있었기에 남자이름인 ‘조지’를 가져와 필명으로 삼은 것 같다. 필명에 사용된 ‘조지’는 작가가 평생을 동거한 유부남 애인 조지 헨리 루이스에서 따온 것으로 심히 의심된다. 작가가 유부남과 스캔들을 일으킨 당시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훗날 조지 엘리엇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작품들은 너무나 빛이 나고 경이로워서 영국의 수많은 지식인이 그녀의 스캔들을 잊고 그녀를 알현하길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흔히 여자를 두고,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하지만, 조지 엘리엇의 경우, 글 잘 쓰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고 하겠다. (물론 이는 엘리엇이 그 시대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남성의 입을 꾹 닥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필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개의 로맨스 소설은 행복한 결혼에서 피날레를 장식한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에 비해 『미들마치』는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심도 있게 접근하고 전방위적으로 파헤친다. 이 작품의 부제는 <지방 생활의 고찰>이다. 나는 눈곱 낀 눈을 껌벅이며 잠시 생각했다. 이게 왜 <결혼 생활의 고찰>이 아니지? 비몽사몽 간에 내 멋대로 해석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조지 엘리엇은 결혼 생활을 소설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인들의 삶을 고찰한 것이었다.  결혼은 그저 그런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지만)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방>은 소설의 무대가 되는 지방도시 <미들마치>를 의미하지만 중심부인 남성이 아닌 주변부인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몽사몽 해석이긴 하지만 나는 발가락을 펴고 고개를 끄덕인다.  

     

영어판 책 중 하나의 이미지. 표지를 장식한 여인은 미들마치의 등장인물 도러시아 브록일까? 아니면 조지 엘리엇일까? 둘의 이미지가 혼재된 듯하다. 

다시 한번 잭 머니건에 따르면, 그녀는 심리학을 파고들고 자신의 경구를 빚어내고 경이로운 재능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고. 하여 이른바 관념소설을 썼다는 작가 대부분은 엘리엇에 비교했을 때, 흡사 소크라테스 이전 존재론 수업 시간에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여 주는 명예교수 앞에서 허튼소리나 재잘거리는 가소로운 신입생처럼 느껴지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이러한 잭 머니건의 평가를 인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느끼는 점을 그대로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하하. 책을 다 읽으면 나만의 평가를 따로 써보고 싶긴 하다.      


주의력을 크게 요구하는 책인 건 분명하다. 소설적 재미도 있긴 하지만, 운명에 맞서는 작중 인물의 위대함에 숙연해지곤 한다. 물론 아침마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읽었기에 난해한 부문도 쉽게 (내 맘대로) 해독할 수 있었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고선 조금 괴롭기 시작한다. 

공백 없이 자주 뭔가 쓰긴 써야 할 것만 같아서 일단 쓰지만 

이처럼 <비몽사몽 글쓰기>까지 동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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