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교실 (5)
3학년 학기가 시작되었다. 얼마 뒤 담임 K가 나를 불렀다. 가능하면 사람답게 지내려고 담대하고 담백한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려던 나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긴장했다. K는 고개를 낮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어머니가 가져오신 미제 암포젤 엠, 그거 한 병만 더 얻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전해줄래.”
미제 현탁액 암포젤 엠은 일동제약이 미국 측과 계약하고 국내에서 생산했다. 그런데 간호사인 옥이 누나는 미국 상표가 붙은 걸 어디선가 잘 구해 왔다.
일동제약 암포젤 엠의 옛날 광고 방송을 보면, 한국산과 미국산은 성분과 제조과정 등 모든 게 똑같다고 설명한다. 다른 점은 오직 한글로 표기된 것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광고가 왜 나왔을까? 6.25 전쟁 시기부터 미국 양약에 대한 맹신이 시작되었다. 70년대까지도 맹신이 계속되었다. 특히 미국제 암포젤 엠은 만병통치약으로 널리 알려졌다. 위장병 없는 사람도 들이켰다. 개발도상국 국민답게 우리는 미국 상표가 붙은 제품의 효과가 훨씬 크다고 굳게 믿었다. 나도 심심해서 먹어본 적이 있었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암포젤 엠을 바라는 K에게 연민을 느꼈다. 따뜻한 도시락을 매일 손수 배달하는 가족분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나는 학교 교사의 요청을 자주 거부하는 못된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의 일화를 들어보면, 내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하루는 담임이 나를 불렀다. 수학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을 학생을 특별히 선별했다며 나에게 참여하라고 권했다. 나는 유명한 단과 학원에서 수학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과외는 싫다고 답변했다. 수업 시간 내내 칠판에다 미친 듯이 혼자 문제만 풀어대는 수학 선생님에게 무슨 재미로 과외를 받아야 하나! 담담하게 거절했더니, 담임이 짜증을 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라고 다그쳤다. 그 시절 학부모는 담임의 요청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곤 했다. 나는, 그냥 알겠다고 끄덕였다. 그러곤 집에 가서 어머니와 상의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에서 담임이 다시 나를 불렀다. 자기 반 학생을 과외 대상으로 포섭하면, 서로 나눠 먹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의 담임이 내게 속삭였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셔? 수학 과외 하라고 하시지?”
고교학생인 내가 담임에게 속삭였다. “제가 결정할 문제라고 하시네요. 저는 그냥 빠질게요.”
담임이 허리를 쭉 펴더니, 세상에 별일 다 본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싫으면 죽어도 싫었다. 내 맘대로 했다. 괜히 어머니를 고민에 빠지게 할 일도 없었다. 과외비용은 학원 수강료의 열 배도 훨씬 넘었을 것이고.
중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 K가 내게 암포젤 엠을 한 병 더 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더는 못 구한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괜히 연민을 느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옥이 누나에게 말했다. 옥이 누나는 다시 한 병 구해 왔다. 며칠 뒤 학급 조례가 끝난 뒤에 나는 K를 뒤따라 나가 그걸 건넸다. K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제 암포젤 엠, 파란색 병을 들고선 열심히 바라보며 교무실로 갔다.
그 뒤로 3학년 생활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이상주 선생님의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다. 선생님은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내게 시험 잘 봤다며 빙긋 웃곤 하셨다. 선생님은 문학에 대해서도 여전히 좋은 언급을 많이 하셨다. 교과서 시는 전부 외워야 성적을 주겠다고도 하셨다. 전부 외우면, 학기 중 아무 때나 자신을 찾아와 테스트를 받으면 된다고. 우리가 삼삼오오 찾아가면 선생님은 무작위로 시를 골라 암송해 보라고 하셨다. 제대로 암송하면 합격, 실패하면 불합격이었다. 나는 교과서에 실린 시 가운데 이국적인 시를 무척 좋아했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를 가장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막상 선생님 앞에 갔더니, 윤동주 시인의 <굴뚝>을 암송하라고 하셨다. 실망감에 젖어 더듬거리는 바람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다음에 다시 도전해야 했다. 선생님은 내 약점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피식, 웃으시면서.
이니스프리의 호도
예이츠 / 김용호 옮김
나는 이제 가련다, 이니스프리로 가련다
진흙과 나뭇가지로 작은 집 짓고
아홉 이랑 콩밭 갈며 꿀벌로 치며
벌이 노래하는 숲 속에서 홀로 살련다
그러면 내 마음 평화로우리
안개 낀 아침부터 귀뚜라미 우는 저녁때까지
그곳은 밤중조차 훤하고 낮은 보랏빛
저녁에는 홍방울새 가득히 날고
나는 이제 가련다, 이니스프리로 가련다
기슭에 나지막이 호숫물 찰싹이는 소리
가로에서나 잿빛 포도에서나
가슴속 깊이 그 소리만 들리나니
선생님의 문학 이야기 가운데,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가장 기억에 남아있다. 이 작품을 설명해 주시며, 문학사에서의 의미도 나름대로 설명해 주셨다. 이 작품 이전의 모든 고전 소설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전부 선남선녀였다고. 못생긴 여자와 무뚝뚝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작품은 이게 아마 처음일 거라고 하셨다. 외모보다 내면을 강조하시는 말씀 같았다.
너새니얼 호손의 대표작 『주홍 글씨』도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에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 작품이다. 가슴에 죄악의 기호 문자를 달고 살아가는 청교도 시대 여인 이야기라니! 선생님은 서구의 마녀사냥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다. 여자가 똑똑하고 미모가 뛰어나면 마녀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훗날 나는 마리아 포포바가 쓴 『진리의 발견』에서 요하네스 케플러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린 사건을 읽었다. 선생님 말씀이 꼭 맞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에 더 쉽게 마녀사냥 대상에 걸려들곤 했다는 걸 알았다. 선생님 설명이 완벽하거나 항상 옳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삶에 큰 자극이 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3학년 담임인 K와는 고등학교 입학 원서 쓰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충돌했다.
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와 산업화 정책에 주력하던 시절이었다. 고도성장 시기였고, 인력 수요가 빠르게 늘었다. 양질의 산업 일꾼 인력을 신속하게 공급해야 했다. 당시 인문계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아이들이 갔다. 실업계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원하는 아이들이 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인력 수요 폭증에 대응하기 위해 우수한 학생들이 실업계에 진학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공업고등학교와 상업고등학교라는 일종의 특수목적고교 진학을 촉진하는 정책을 내놓았던 같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교육 열풍도 엄청 강하게 불었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는 부모도 많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경우에 실업계 진학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진 학생도 많았다.
문제는 나라의 정책을 위해 개인의 선택을 지나치게 억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실업계 학생에게 가산점을 주는 등 우대 정책이 나왔지만. 학부모의 인문계 선호도는 여전히 높았다. 대부분 교사도 학부모와 학생의 자율적인 선택을 크게 막지는 않았다. 나라의 정책은 정책이고, 개인의 선택은 개인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우리 반 담임 K는 달랐다.
적극적으로 실업계 진학을 권장했다. 나름 논리를 내세웠다. 우선 인문계와 실업계 진학이 성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꼭 성적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었으나 K는 일단 그렇게 규정했다. 반에서 상위 30등 안에 들어가면 인문계로 진학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K는 마치 모든 이가 성적만으로 진학을 결정하는 것처럼 간주했다. 그러면서 그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반에서 30등 하는 친구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면 어떻게 되지? 생각해 봐. 다른 학교에서도 30등 하는 친구가 가잖아. 그러니, 중학교에서 30등 하는 아이는 고등학교에 가면 반에서 꼴찌 아니면 꼴찌에서 두 번째가 되는 거야. 인문계에 가더라도 꼴찌가 대학 가기는 영 힘들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올라가는 학생도 분명히 있을 텐데, 너무 획일적인 논리를 적용하다니. 무슨 유전자 결정론자도 아니고.
K는 계속 말했다. “중학교에서 상위권 학생이 실업계에 가면 어떻게 되지? 반에서 일 등이나 이 등은 문제없지. 누워서 떡먹기라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실업계 학생에게 대학 입시 우대 정책을 쓰고 있어. 본고사 보려면 어렵잖아. 머리 아프고. 실업계 고교에 진학해서 상위권 학생이 되면 대학은 특혜로 쉽게 갈 수 있다고!”
대다수 학부모는 이런 주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반의 담임교사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은 실험적인 정책에 대해 너무 쉽게 동조하는 논리는 주의해야 한다고 여겼다. 문제는 K가 초지일관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내 학교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못해도 반에서 10위 권은 유지했다. 해영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조금 더 공부를 잘했다.
K의 고집은 고교 원서를 쓸 때 많은 학부모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요즘은 잘 모르겠으나, 그 시절에는 진학 원서를 쓸 때 담임의 의견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반에서 10위가 아니라 전교에서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L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K의 고집과 주장에 넘어 가 S 공고에 진학하기로 했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해영이는 상업고등학교를 권유받았는데, 역시 담임의 고집을 못 이겨 D 상고에 진학하기로 했다.
내 경우에는 어머니가 나섰다. 한 시간 넘게 면담하며 상당히 다투었다고 한다. K는 처음부터 나를 상업고등학교에 보내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머니는 인문계가 아니면 안 된다고 버텼다. 며칠 밀당을 하다가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어느 특수목적학교 가운데 하나로 보내기로 했다. 인문계였지만, 정부가 진학을 장려하는 대상 학교이기도 했다. K는 이 학교를 권하기 시작했다. 인문계라면서. 어머니는 할 수 없이 그러자고 타협했다.
웃기는 것은 학급에서의 성적이 해영이와 나보다 훨씬 아래인 학생이 인문계 고교 원서를 허락받은 경우가 있다는 거였다. 도대체 기준이 뭔지 궁금했다. 어쨌든 우리 반에서 인문계로 진학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다른 반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정부의 거시정책에 호응한다는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정도가 심한 게 문제였다. 그는 왜 그리 적극적이었을까.
이 문제를 옆에서 지켜보는 이상주 선생님도 우리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루는 수업 시간에 뜬금없이 당신의 대학교 선택 이야기를 해 주셨다. 여고 시절, 담임선생님이 S대학교 사범대학 응시 원서를 안 써주려고 했다는 거였다. 합격할 자신 있다고 강하게 우겨서 간신히 원서를 냈다고 하셨다. 공부를 잘하던 다른 여고 동창 세 명은 이상주 선생님만 멀리하고 자기들끼리 모여 공부했다고. 막상 본고사 시험 결과에서는 선생님만 혼자 합격했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스스로 자랑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훗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누구나 후회 없는 결정을 스스로 선택해야 함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으셨던 거였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윽고, 내가 J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내기 위해 출발하는 날이 왔다. 겨울이 시작되어 바람이 쌀쌀하게 부는 시기였다. 나는 담임 K가 승인한 입학 원서를 받아 들고, 혼자 고등학교에 응시 원서를 접수하러 가기 위해 교무실을 나왔다. 고등학교는 상당히 멀었다. 버스도 드물게 다니는 서빙고라는 동네였다. 서울인데도 그런 외딴 장소가 있다니!
운동장을 걸어가는데, 이상주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났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이언아, 너 어디 가니?”
“선생님… 저 원서 내러 가요.”
“어느 학교로 가기로 했어?”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그리 먼 곳까지 가야 하니? 이곳 근처에도 좋은 고등학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그리 먼 곳으로 널 굳이 보낸다는 거니? 이해가 안 되네.”
선생님은 나를 다그치거나 나무라는 것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할 뿐이었다. 우리 반 담임 K의 진학 지도가 이상주 선생님에게는 교사의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 반의 학생이 아니라 다른 반 소속의 학생이었다.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나는 땅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H중학교와 같은 교정에 있는 H고등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선생님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내 마음대로 학교가 배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곳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도… 인문계래요.”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선생님이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던 것 같다. 너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라, 그런 눈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선생님도 한계가 있고 더 깊이 개입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한계가 있었다. 형이나 선배가 있었다면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J 고등학교가 내가 원하는 인문계 학교였기에,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선택권을 뺏긴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문득 뒤돌아보았다. 선생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선생님은 물끄러미 나만 쳐다보며 그냥 서 계셨다. 교문을 향해 내려가는 제자를 조용히 바라만 보셨다.
교육자로서 제자들이 너무나 무력하게 선택권을 빼앗기는 모습에 선생님은 무척 화가 나셨던 것 같다. 선생님을 운동장에서 만난 것도 정말 우연이었을까? 선생님이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J 고등학교는, 뭐, 나쁘지 않았다. 남녀공학이었고 나름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 성격에 딱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대부분 씩씩했다. 어깨에 힘주고 다니거나 젠체하거나 했다. 선배들은 걸핏하면 군기를 잡곤 했다. 여학생들은 씩씩한 남학생을 좋아하는 것만 같았다. 다들 그런 건 아니었지만. 허약하고 숫기가 별로 없었던 고교생 팽이언은 3년 내내 조용히 지냈다. 솔직히 좀 우울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까지 등하교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침마다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를 가야만 했다. 왕복 세 시간이었던 같다. 그래서 짜증이 많이 났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아직도 서로 연락하며 격려하는 멋진 친구들을 여럿 만난 곳도 다름 아닌 고등학교에서였다.
저녁에는 서대문에 있는 단과 학원에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끝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학원 수강을 듣고 밤늦은 시각에 학원을 나섰다. 어둠의 거리로 흩어지는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 나를 크게 불렀다.
김해영이었다. 반가웠다. 우리는 밤의 길목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해영이는 우리나라 상업고등학교 가운데 가장 좋다는 D 상고로 진학했었다. 그런데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원에 다닌다고 쓸쓸하게 덧붙였다. 실업계 학교의 교과목들이 중학교 시절과는 사뭇 달라서 흥미를 잃어버리고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해영이와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학교 졸업식이 떠올랐다. 이상주 선생님은 매해 졸업식이 다가오면,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가슴 아프다며 우울해하셨다. 졸업식 행사가 끝나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혼자 교무실로 들어가신다고 했다. 그런 예고를 한 선생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망설여졌다. 떠나가는 제자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시는 선생님에게 굳이 찾아가야 하는 걸까? 나 역시 정든 교정과 선생님을 떠나는 게 슬펐다. 그래서 더 망설여졌다. 그런데 해영이가 나를 불렀다. 내 팔을 잡아끌면서 이상주 선생님에게 인사하러 같이 가자고 했다. 그날은 김해영이 주동자가 된 셈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냥 따라나서게 되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중학교 졸업 앨범을 펼친다. 나는 이상주 선생님이 맡았던 반의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교훈으로 적어두신 앨범 속 문장이, 마치 내게 직접 해주신 말씀처럼 느껴진다. 이 문장 하나를 늘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온 것 같다.
“사물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삽시다.”
브런치북 [책과 기억, 통속적으로 우울한]의 연재는 오늘로 마감합니다.
원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며 매번 거칠게 쓴 글인데도 라이킷 해주신 분과 격려의 댓글을 남겨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면서 행복했습니다.
개인정보 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분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지역과 학교명도 변경하였습니다.
이상주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아보려고 오래전부터 노력했습니다. 브런치 연재를 시작하며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S대학교 사범대학 동창회에서 발간한 수 년 전 동창회보(PDF)의 회비 납부자 명단에서 선생님 이름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곧바로 그곳에 문의하니,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이 글 후반부를 쓰고 있을 때 그곳으로부터 답신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별세하셨다고.
제 마음은 오늘 종일 비가 내리네요. 늦었지만,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