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크리스마스 특집 소설
나는 공부를 잘한 편이 아니었고 머리도 좋지 않지만 이런 우연의 일치가 흔한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준 판도라의 상자가 이렇게 쉽게 발견되다니! 믿기 어렵다. 갑자기 미미가 그려준 그림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핑크스를 가슴과 무릎으로 꼭 붙잡고, 한 손으로 코트의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찾는다. 쪼그리고 앉은 채 지갑 속에 있는 종이를 꺼내어 펼친다. 바로 미미가 그려준 판도라 상자의 그림이다. 나는 그림 속 상자와 눈앞에 있는 노숙자의 밥그릇 상자를 비교해 본다. 아주 완벽하게 똑같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미가 그린 그림이 워낙 단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쪽이 아래보다 약간 더 넓다는 점과 상자 모퉁이에 뾰족한 뿔 모양이 솟아 나온 게 쏙 닮았다. 상자 상단과 하단의 사각 면 가운데에는 동그란 구슬이 양각으로 도드라져 튀어나와 있는 것도 똑같다. 이 정도면 95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같은 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핑크스가 갸르릉 거리며 뒤척인다. 답답한 모양이다. 그때 노숙자가, 크응, 하며 숨을 크게 내쉬더니 몸을 돌린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노숙자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살핀다. 검은 피부, 주름진 이마, 희끗희끗한 장발의 머리카락. 그런데 지금 보니 수염도 상당히 덥수룩하다. 조금 전 처음 보았을 때는 별로 없어 보였는데, 그 사이에 수염이 길게 자란 것일까?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물결의 수염이라니! 더 이상한 것은 노숙자가 아주 깊이 잠들어 있다는 거였다. 이 추운 날씨에, 이런 지하보도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낡은 누더기 모포 한 장만으로 저리 평온히 잠들 수 있다니!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다. 산신령도 아니고 지하보도의 귀신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어찌 저리 고요한 타지마할처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 건지! 달빛도 없는데.
타지마할은 궁전인가 묘지인가? 여행잡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상자를 다시 바라본다. 모포 사이로 삐져나온 상자의 뚜껑을 슬그머니 잡아 든다. 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뚜껑이 맞다. 딱 맞게 닫히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판도라의 손길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어찌 이리 딱 맞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게 판도라의 상자가 틀림없다고 다시 확신한다.
이걸 가지고 돌아가자.
나는 생각한다. 미미가 그토록 찾던 판도라의 상자가 분명해. 그러니 이것을 미미에게 보여 줘야 해. 그렇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노숙자 걸인의 밥통을 훔친다는 게 양심에 걸리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게 진짜 판도라의 상자라면, 거의 진짜가 분명한데, 미미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도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 가지고 돌아가자.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한 손으로 집어 든다. 노숙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나는 녹색 고양이와 상자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걸음을 돌린다. 살금살금 걷는다. 지하보도의 끝에 있는 계단에 이른다.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크흑!
나는 깜짝 놀란다. 심장이 잠깐 멈춘다. 숨을 참고 슬그머니 뒤 돌아본다. 아! 노숙자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아 있다. 그는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주변을 살핀다. 이윽고 나를 바라본다.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가 앞발을 앞뒤로 흔든다. 빨리 도망쳐, 하고 외치는 것 같다. 갸르르르릉! 노숙자 노인의 눈이 전구처럼 커지더니 파란 불을 내뿜는다.
어어, 야… 거기… 야!
나는 재빨리 계단을 향해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야, 임마 내 통 가져와! 내 통 내놔! 나는 황급히 달린다. 흰 눈 사이로, 상자를 들고, 소리 죽여 달린다.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가 입을 쩍 벌리며 지하보도 입구를 향해 갸르릉 소리를 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숨이 차오른다. 노숙자가 뒤따라오는 것 같지 않다. 101동에 들어서자,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가 내 품에서 훌쩍 벗어나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간다. 자기도 집에 돌아오니 안심이 되는 표정이다. 현관문에 들어서자 스핑크스가 거실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나는 문을 잠그고 거실 소파로 간다. 상자를 녹색 유리 테이블 위에다 놓는다. 스핑크스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미미의 침실로 사라진다. 저런 나쁜 자식. 얼어 죽을 걸 구해줬더니 다시 또 날 약 올리네. 하지만 아까처럼 부아가 치미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판도라의 상자가 눈앞에 있다는 흥분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젖은 걸레를 챙겨 들고 판도라의 상자 앞에 앉는다. 걸레를 들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닦는다. 단단하고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청동 상자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10분이 넘도록 상자를 정성껏 닦는다. 청동 상자를 닦을수록 신비한 기색이 넘친다. 이윽고 더 이상 닦을 게 없는 것 같다. 이제 미미가 오기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자꾸만 호기심이 생긴다. 상자 속을 들여다본다. 작은 고리를 들어 두 번째 뚜껑을 열면 과연 희망이 튀어나올까? 그게 궁금하다. 시간이 자꾸 흘러간다. 하지만 미미가 오려면 아직도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게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면? 문득 그런 의심이 생긴다. 미미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어떡하지? 미미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열어보면 어떨까?
갑자기 다시 용기가 생긴다. 나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상장 속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다. 고리가 보인다. 나는 손을 살짝 집어넣는다. 고리를 만지작거린다. 천천히 그걸 들어 올린다. 귀를 기울여 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금만 더, 하고 나는 중얼거린다. 눈을 크게 뜨고 상자 속의 뚜껑을 조금 더 잡아당긴다. 그 안에는 더 큰 어둠이 잠겨 있는 것 같다. 아, 나도 모르게 뚜껑을 반쯤 연다. 그러자 거실의 불빛 아래 상자 속의 상자 안에 뭔가 있는 게 보인다. 궁금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뚜껑을 연다.
이게 뭐지?
상자를 뒤집어 본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 한 장의 사진이 펄럭이며 떨어진다. 낡은 사진이다. 사진을 집어 들고 본다. 어린 여자애가 웃고 있다. 나비 모양의 머리띠를 매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작은 소녀다. 노숙자 걸인의 딸인 것 같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멍한 얼굴로 사진만 계속 들여다본다. 그런데 사진 속 소녀의 얼굴은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하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의 미미를 닮은 것도 같다. 아니 세상 모든 아이의 얼굴 같기도 하다. 밝게 웃는 미소는 여행잡지에서 본 베네치아의 곤돌라처럼 예쁘다. 눈은 맑은 종소리 같다.
괜히 마음이 흐뭇하다가 슬퍼지고, 세상 모든 게 애처롭게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발코니 창 너머의 하늘을 바라본다. 눈은 어느새 그친 것 같다. 밤하늘에는 어둠이 가득하다. 어둠 속 하늘에서는 구름이 천천히 유영한다. 미미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스핑크스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그 자식이 갸르릉 하며 숨을 내뱉은 소리가 들린다. 그때 -
덜컥, 현관문이 열린다.
(1부 끝.)
1부가 끝났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처럼 2부가... 조만간 (좀 쉬고) 연재될 예정입니다. ㅎㅎ
(일주일 뒤인 12월 18일 예정입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제가 쓴 초고에서는 대충 이 대목에서 소설이 끝납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결말이 너무 싱거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계속 고민하다가 일단 <녹고판> 이야기를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1부는 여기서 끝내고요. 좀 쉬었다가 2부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만, 개인 사정으로 주 4일 연재 일정은 다소 변경할 계획입니다. 나중에 다시 안내하겠습니다.
예고편 그림을 삼성 노트 앱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삼성 노트 앱으로 그린 저의 첫 번째 그림입니다. 모델 사진으로 어느 탐정소설 표지와 이집트 고양이 사진을 훔쳐와서 그 위에다 S펜으로 윤곽을 따라간 것입니다만... ㅎㅎ